SAKURAZAKA46 (KEYAKIZAKA46)

BRODY 2019년 4월호 모리야 아카네 (사진, 인터뷰 번역)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우리들의 존재의의라고 할 수 있는 이 무기는

케야키자카46을 언젠가 정점으로 이끌어주는 걸까


모리야 아카네


힘껏 춤춰라


이 무대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춤추는 것이,

케야키자카46가 케야키자카46로 있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모리야 아카네는 믿고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들을 지탱하고,

그 아이가 보여주는 것이 양식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케야키의 댄스는 체력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을 빼지도 않고

'가볍게 해도 괜찮아요'라고 들어도 '가볍게' 할 수 없어요



춤추지 않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싶었다



- 케야키자카46는 데뷔곡 "사일런트 마조리티"부터 최신곡 "검은 양"에 이르기까지, 댄스가 인상적인 그룹이에요. 지금까지도 댄스가 주력인 아이돌 그룹은 많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댄스를 주축으로 하는 아티스트도 있습니다. 하지만 케야키자카46는 그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 지금까지 없었던 타입의 그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안무 선생님 TAKAHIRO 씨의 공도 크다고 생각하는데 모리야 씨는 퍼포먼스를 어떤 마음으로 마주보고 계시나요?


모리야 굉장한 춤이라고 해야할까, 춤추면서 즐거워요.



- 기술적으로는 점점 어려운 것이 요구되는데요.


모리야 그렇네요. 확실히 TAKAHIRO 선생님도 서서히 난이도가 높은 걸 만들어 주시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려운 안무가 온다는 건 점점 향상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도전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져서, 그건 순수하게 기뻐요. 그래서 매번 '다음엔 어떤 안무가 오는 걸까?'라고 기대되고, 오랜만에 이전의 곡들을 한번 춰보면 완전히 다른 걸로 보이는 것도 있고, 정말 깊고 재밌다고 생각해요.



- 원래 모리야 씨는 케야키자카46에 들어가기 전, 댄스의 경험은?


모리야 없었어요.



- 전에 멤버 중 누군가에게 '누가 가장 댄스에서 성장했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어봤을 때, 모리야 씨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어요.


모리야 와! 그건 기쁘네요. 처음엔 리듬 타는 것도 전혀 못 했는데, 춤을 못 춘다고 생각되는 것도 싫고 분했어요. 그런 이미지를 꼭 불식시키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 거기에 더해서, TAKAHIRO 씨가 매번 다양한 과제를 준비하는데, 모리야 씨는 어떤 모티베이션으로 열심히 하게 되나요?


모리야 TAKAHIRO 선생님이 언제나 굉장한 안무를 만들어주셔서, 그 훌륭한 안무를 표현하는데 저희들이 기술이 없거나,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하면 전하고 싶은 것도 전해지지 않으니까, 그걸 위해서도 열심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매번 하고 있습니다.



- 그 '전하고 싶은 것'은 가사에 담긴 메시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아키모토 야스시 씨가 쓴 가사에 맞게 TAKAHIRO 씨가 안무를 만들고, 그 외에도 여러 스태프가 그 곡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합니다. 그걸 멤버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이미지에 가까워지는지, 혹은 그걸 넘어서 케야키자카46만이 가능한 작품을 만들어 온걸까, 그 대하는 방식도 독특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리야 확실히, 모두 굉장히 마음을 담고 있어요. 그건 느껴져요. '지금까지의 아이돌과는 다르다'고 자주 듣는데, 그 독특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퍼포먼스에도 더욱 힘이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네요.



- 게다가, 팀이라는 느낌이 강해요.


모리야 맞아요.



- 그 이유는 전원 선발이라는 멤버 구성도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거기에 그 주위의 스태프 분들을 포함해서, 전원이 하나가 되어 작품을 대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전해져 옵니다.


모리야 그래서 MV촬영 때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해서, 완성했을 때의 다같이 해냈다는 성취감과 단결감이 대단해요. 그걸 느끼면서 항상 '아, 열심히 하길 잘했다'라고 생각해요.



- 연말연시의 음악방송에서의 '안비바렌토' 센터 릴레이도 확실히 전원이 단결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AKAHIRO 씨가 센터를 맡은 멤버 각자의 곡에 해석에 따른 안무를 매번 만들었는데, 그건 엄청 손이 가잖아요.


모리야 시간이 없는 와중에, 그 멤버의 분위기에 맞춰 여러 패턴의 안무를 만들어 주셔서요. 정말로 TAKAHIRO 선생님이 제일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비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다른 아이돌 그룹은 센터가 바뀌어도 안무가 그렇게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케야키자카46은 그렇게는 안 된다는.


모리야 정말 대단해요(웃음). 그렇지만, 전혀 힘들지는 않고 오히려 그게 케야키자카46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곡과 가사로는 나오지 않는 부분을 채우는 댄스가 있어서 케야키자카46가 존재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



놀람의 눈물과

언젠가 꿈꾸는 상



- 그 중에 '일본 레코드 대상'과 'NHK 홍백가합전'이라는 큰 무대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도전할 때의 마음은 혹시 평소와는 조금 달랐을까?하는 인상도 있었습니다.


모리야 제 개인적인 마음은 특별히 매번 변하지 않아서요. 하나 하나, 전부 중요하니까 거기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지만, 레코대나 홍백은 봐주실 기회가 평소보다 많은 만큼, 안무 보강은 후짱(사이토 후유카) 등을 선두로 평소 이상으로 노력했습니다.



- 사실 사토 시오리 씨나 스즈모토 미유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완전히 똑같은 답이었어요.


모리야 와, 대단해! 똑같았나요?(웃음) 놀랐어요!



- 저도 놀랐습니다(웃음). 어떤 음악방송에서든지 케야키자카46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줄 찬스이기 때문에 긴장을 놓지 않는다. 특히 케야키자카46은 거기서 매번 100 이상을 보여준다. 이 에너지는 어디에서 생기는 건가요?


모리야 너무 전력으로 하니까, 매번 끝난 뒤에는 모두 심하게 숨이 차지만요(웃음). 음악방송은 본방까지 악기 조율이나 카메라 리허설 등 많은 리허설이 있는데, 거기서도 매번 전력으로. 케야키의 댄스는 굉장히 체력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을 빼지도 않고, 항상 그 계산이 어려워요(웃음). 그래서 자주 '가볍게 해도 돼요'라고 듣기도 하지만, 그 '가볍게'가 안 돼요. 케야키의 댄스를 가볍게 추면 확인이 안 되기도 하고요.



- 그렇군요. 특히 레코대는 대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거나, 그런 어렴풋한 기대도 있었나요?


모리야 저희한테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상과는 관계 없이 단순히 퍼포먼스를 열심히 하자고. 다음날 홍백은 다른 곡('유리를 깨라!')이었고, 그 리허설도 있어서 아슬아슬할 때까지 그 연습도 했었고요. 쓸데 없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거기서부터 다음날 TAKAHIRO 씨의 눈물로 이어졌는데요. 'AKB48 SHOW!'(NHK BS프리미엄)에서도 방송되었는데, 홍백 당일에 TAKAHIRO 씨가 레코대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한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처음엔 여러분, 어리둥절했죠.


모리야 '어라, 어떻게 된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우는 것처럼 보여서 '헉'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까지 저희들을 생각해주시다니... 저희들도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고, 정말로 굉장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후짱과 '언젠가 선생님에게 대상 상패를 보여드리고 싶네'라고 얘기했어요.



- 자신들이,라기보다도 주변에서 지탱해주는 스태프 분들을 위해서,라는 거네요. 그 모습을 보고 난 뒤의 홍백은 마음이 조금 다르지 않았나요?


모리야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히라테 (유리나)도 나올 수 없었어서, 히라테를 위해서 춤춘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 그 날의 퍼포먼스는 매우 감정적이고 평소의 라이브에 가깝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모리야 아, 그렇네요. 그럴지도 몰라요. 확실히 라이브에 가까운 느낌이 있었어요.



- 그 상징은 아니지만, 간주에 원을 만들 때 코바야시 유이 씨가 무언가 외쳤죠. 거기에 동조하는 것처럼 멤버나 주위의 댄서 분들도 모두 외치는 장면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리야 그 때, 저는 유이퐁(코바야시)이 외치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것보다도 주위를 감싸고 있던 멤버들의 목소리에 반응해서요. 그래서 '나도 더 해야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게 자연스럽게 일어났다는 게 케야키자카46답네요. 조금 화제에 벗어나지만, 레코대나 홍백에서 같은 무대에 설 수 없었던 히라테 씨에 대해서입니다. 모리야 씨가 본 히라테 씨의 댄스, 퍼포먼스는 어떤가요?


모리야 초기부터 계속 히라테의 등을 볼 때가 많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더 잘하게 되고 싶다든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멋있게 보이는구나 같이 굉장히 배우는 게 많았고, 뒤에서 보지 않으면 모르는 작은 움직임을 포함해서 참고했습니다. 예를 들어 '네가 없어'에서는 이 안무를 할 때의 시선을 이렇게 하면 굉장히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같이. 특히 '불협화음'의 MV 촬영이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같은 씬을 몇 테이크씩 찍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카메라가 돌기 직전까지 안무 확인을 했는데, 히라테만은 이미 곡의 세계관에 집중하고 있달까, 이미 "들어가" 있었어요. 그걸 봤을 때 '아, 이런 건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 그 현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시작되는 거네요.


모리야 맞아요. 저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정말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 그러면 모리야 씨가 봤을 때 3년간 댄스가 성장한 멤버는?


모리야 변했다고 할까, (우에무라) 리나짱과 작년 쯤부터 굉장히 이야기하게 되었는데요. 엄청 영상을 체크하고 있는 멤버예요.



- 그건 본인들의 리허설이나 라이브 영상?


모리야 네. 전체를 보는 멤버고, 댄스도 빼놓지 않고 체크하고, 안무에서도 '여기가 이렇게 됐다'고 바로 알아채는 멤버예요. 그런 부분도 의식이 높다고 생각해요.



- 분명 우에무라 씨는 모두를 따라가고 싶다는, 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거겠죠.


모리야 그렇네요. 그렇게 느꼈습니다.



어떤 포지션에서도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 그리고 케야키자카46는 다른 대인원 아이돌 그룹과 다르게 포지션에 대한 개념도 다르구나 하고. 다른 아이돌 그룹이라면 3열은 눈에 띄지 않고 낙심하는 경우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케야키자카46의 경우에는 일단 댄스가 시작되면 3열이라서 눈에 띄지 않는다거나 하는 게 전혀 없고, 제대로 개개인에게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통의 느낌이라면 '검은 양'에서 스즈모토 씨가 3열이라는 것에 깜짝 놀랄 거라고 생각해요.


모리야 그것이야말로 TAKAHIRO 선생님이 거기까지 제대로 생각해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어디에 있어도 각자 역할이 있고, 곡에 따라 포메이션에 굉장히 이동이 있을 때도 많아서, 그런 의미로 말하면 처음에 어디에 있는지에 관계 없이, 어디에 가도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모리야 씨 개인으로서는 댄스를 어느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예를 들면 케야키자카46을 졸업한 뒤에, 댄스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 한 이렇게까지 요구되는 일은 없겠죠. 지금, 왜 여기까지 노력하신건가요?


모리야 기술적인 것이 무엇으로 연결되는지 물어본다면 모르겠지만, 안무를 외우는 건 기억력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고, 강한 멘탈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표현하는 데 있어서 앞으로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해서, 지금은 여러가지를 흡수할 때, 공부할 때라고 생각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댄스에 한정하지 않고, 더 넓게 표현에 연결하면서. 참고로, 좋아하는 안무는?


모리야 '불협화음' 일까요. 케야키자카46 안에서도 특히 폭발할 수 있는 곡이라서 발산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춤추면서 굉장히 즐거워요.



- 그러면, 이건 어렵다고 생각하는 안무는?


모리야 '바람에 휩쓸려도'의 안무를 외울 때, 처음에 '위험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발의 움직임이 어려워서, '뭐야, 이 스텝은?'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안비바렌토'도 힘들었네요. 이 정도의 동작을 하는건가 싶을 정도의 양이었고, 게다가 템포도 빨랐고요. 역시 점점 난이도가 올라가네요.



- 그렇다고 해도, '사일런트 마조리티'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댄스를 중시하는 그룹으로 성장할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겠죠.


모리야 그렇네요(웃음). 매번 다른 것에 도전하고 있어서 신선하고, 전혀 질리지도 않아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그런 댄스는, 케야키자카46에게 무엇을 남겨주나요?


모리야 음악을 듣고 가사를 읽어서 생기는 이미지를, 댄스로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간달까. 듣고 읽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댄스를 통해서 전해질 수 있고, 곡이나 노래로 나올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기도 하고요. 댄스가 있기 때문에 케야키자카46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BRODY 2019년 4월호 스즈모토 미유, 사토 시오리 (사진, 인터뷰 번역)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토 시오리 X 스즈모토 미유


춤추지 않을 이유는 없다


'춤을 춘다'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에 필요한 경험인가. 반드시 갈고 닦아야 할 스킬인가.

케야키자카46에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멤버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장소에서, 그저 춤을 춘다.

그것이 이 그룹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춤추는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TAKAHIRO식 스텝 업


TAKAHIRO 선생님의 안무는 0에서 3으로 가는 게 아니라 0->1->2->3으로 차례차례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 케야키자카46의 매력 중 하나는, 지금까지 활동해온 아이돌 그룹과는 다른 독창적인 댄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나온 건 데뷔 싱글 '사일런트 마조리티'부터였지만,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케야키자카46의 댄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스즈모토 케야키자카46에 들어오기 전에 저는 E-girls를 좋아해서, 아이돌은 아이돌, 댄스 그룹은 댄스 그룹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했었어요. 저희는 1st 싱글부터 TAKAHIRO 선생님이 안무를 만들어주셨는데, 처음에 노기자카 분들의 여동생으로 들어갔으니까 부드럽고 청초한 안무일까 하고 생각했더니, 전혀 분위기가 달라서 그 때는 '아, 이런 방향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건 스즈모토 씨가 굉장히 하고 싶었던 방향이었나요?


스즈모토 거기에 대해선 특별히 원하는 게 없었어서. 그정도까지 댄스를 하고 싶었는지 말하자면, 별로 엄청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기쁘거나 하는 감정은 특별히 없었어요.



- 오히려 하면서 점점?


스즈모토 그렇네요. 하던 중에, (제가) 역시 춤추는 걸 좋아한다는 걸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사토 씨는 케야키자카46 이전에 계속 클래식 발레를 계속해왔습니다만, 그곳과는 다른 세계네요.


사토 그렇네요. 클래식 발레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부분이 아름답지만, 몸의 상반신을 고정시킨 채로 해요. 너무 (자세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고 들어서 예쁜 기본자세를 유지한 채로 손발을 움직여서 춤을 추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 케야키의 댄스는 반대로 인/아웃 같은, 가슴을 넣었다 내밀었다 하는 것 같은 동작이 기본으로, 그걸 할 수 있게 되면 다른 동작도 멋지게 출 수 있다는 걸 처음에 배워서, 발레와 다른 점에서 '어떡하지?'하고 고전했어요. 어느쪽인지 말하자면 힙합계잖아요. '클래식 발레를 해왔다=춤출 수 있다' 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기 때무에 어려워서 처음에는 불안감이 굉장히 컸어요.



- 신곡이 나올 때마다 TAKAHIRO 씨가 새로운 안무를 만들면서, 점점 레벨이 높은 걸 요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매번 어떻게 마주보고 계신가요?


사토 TAKAHIRO 선생님의 안무는 이전 곡에 나왔던 것이 다음 곡에 살짝 사용되는 게 있어서, 이 한 곡이 가능하면 다음 곡으로 가기 쉽다고 해야하나.


스즈모토 아, 맞아. 플러스로, 라고 할까.


사토 그래서 0부터 3으로 가는 게 아니라 0->1->2->3으로 차례차례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 반복이 있어서 조금의 불안은 있어도 처음 부딪히는 어려운 벽 같은 건 없고, 이 안무를 더 잘 하자는 마음이 돼요.


스즈모토 TAKAHIRO 선생님도 '"사일런트 마조리티"부터 점점 스텝이 올라가고 있으니까, 이건 전에 했던 걸 더 이렇게 한 동작이야'라고, 거기에 대해서 이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확실히 알기 쉽고요.



퍼포먼스 중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 그런 댄스를, 여러분은 어떤 장소에서든지 한판 승부같은 퍼포먼스를 하는군요. 항상 감탄하는 건 음악방송의 퍼포먼스에서 이렇게까지 스토익하게 몰입하는건가 싶을 정도의 기백으로 춤추는 것. 춤추는 데 익숙해진 곡이라면, 말하자면 빼는 법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케야키자카46에게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아서 항상 감동합니다.


스즈모토 확실히 음악방송에서 여러 번 (피로)하면 역시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방송마다 TAKAHIRO 선생님이 '더 이렇게 하자'라고 지적해주세요. 그런 의견을 들으면 항상 긴장감도 생기고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요. 게다가 저희의 퍼포먼스가 TV 프로그램에서 방송될 때 팬이 아닌 분들은 그 한 번밖에 보지 않을 테니까, 아직 케야키자카46을 모르는 분들에게도 거기서 인상을 남기고 싶어요. 그 곡을 퍼포먼스, 댄스, 노래를 포함해서 잘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한 번 한 번을 진지하게 하고 싶어요.




항상 우리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메시지성이 강한 케야키자카46의 곡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과연. 그야말로 그 진면목이었던 것이 연말연시 '안비바렌토'의 센터가 프로그램마다 바뀌고 거기에 맞춰서 안무도 조금씩 변경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타자는 스즈모토 씨였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남아있어요.


스즈모토 전에도 다른 인터뷰에서 '화제가 됐어요'라고 들었는데, 스스로는 잘 몰라서(웃음). 그 때는 히라테 (유리나)가 부상으로 출연할 수 없게 돼서, '안비바렌토'의 프론트 4명이 차례대로 센터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처음으로 하게 됐어요. 솔직히 말하면 얘기를 듣고 나서 본방까지의 시간이 짧아서 안무를 외울 때는 조금 불안해지기도 했지만, 리허설 때 멤버들이 말을 걸어 줬어요. 정말로 쓸데 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연습을 하다가 본방을 맞이했다는 느낌이었어요.



- 스즈모토 씨는 그 곡을 센터에서 퍼포먼스하는 데 있어서, 속으로 무엇을 가장 의식했나요?


스즈모토 뭐랄까...(오래 생각) ...사실은 이런 테마의 인터뷰에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댄스나 퍼포먼스에 있어서 제 자신의 감정을 전혀 모르겠어서요. 춤추고 있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평소 생활하고 있는 감정과 퍼포먼스를 하고 있을 때의 곡의 감정이 같지는 않달까.



- 그건 춤추고 있을 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건가요?


스즈모토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곡의 해석같은 것도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설명도 못 하겠고,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곡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는?


스즈모토 맞아요. 그 정도로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웃음).



- 전에 스즈모토 씨를 인터뷰했을 때, '이렇게 얘기하는 걸 잘 못하니까, 그만큼 댄스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면'이라고 하셨는데요.


스즈모토 맞아요. 정말로 말로 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요. 그래서 오늘은 이런 테마의 인터뷰라고 사전에 들었을 때, '아! 어떡하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쓴웃음).



-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웃음). 사토 씨는 이 센터 릴레이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사토 애니버서리 라이브를 경험하면서 센터가 바뀌는 것에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거기엔 감정이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야말로 센터를 하는 아이가 가장 짊어지고 있는 게 클 테니까, 주위에서는 평소대로 해야 할 일을 해나갈 뿐. 거기에 더해서 TAKAHIRO 선생님이 매번 센터의 분위기마다 안무를 조금씩 바꿔주셔서, 저에게 주어진 변경사항을 마주하고 가는, 작은 일이라도 그걸 제대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보다도 케야키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을


- 그러면, 그 클라이맥스가 된 'NHK 홍백가합전'은 어떠셨나요? 홍백은 일본 음악 씬에서도 명실상부 톱 클래스가 아니면 나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곳을 향한 여러분의 기분은 어떠셨나요?


스즈모토 저는 여러 음악방송들 중에 '이건 잘 하지 않으면 안 돼'라든지 '여기서만은 기합을 넣어서 해야 해'라든지, 그런 기복이 없어서. 특히 홍백은 케야키자카46을 모르시는 많은 분들이 봐주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모르는 분들에게 전한다는 의미에서는 평소의 음악방송과 똑같고, 언제나 그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메시지성이 강한 케야키자카46의 곡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사토 저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라서 특별히 기합을 넣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야말로 어떤 음악방송에서 피로하든지 똑같이 특별해서요. 곡마다 출연할 수 있는 음악방송의 수가 결코 많지 않으니까, 어딘가에서 방심하지 않고, 하나하나가 중요해요.



- 그 대하는 방식은, 어떻게 생겨난 건가요?


사토 역시 처음부터 전원 선발이라는 것도 컸을까요. 졸업한 멤버도 있지만 곡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모두 계속 함께였으니까, 모든 감정을 전원이 맛보는 거잖아요. 모든 과정이나 마음을 공유하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같은 마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AKB48 SHOW!'(NHK BS 프리미엄)에서 방송되었지만, 홍백 당일에는 TAKAHIRO 씨가 레코대(레코드 대상)를 타지 못한 아쉬움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스즈모토 설마 했어요. 그런 모습, 지금까지 본 적이 있으려나?


사토 없었지.


스즈모토 확실히 처음에는 '응!?'하고 놀랐네요. 하지만 그런 TAKAHIRO 선생님의 강한 마음을 느껴서, 저 자신도 모두도 눈물을 흘리고 정말 좋은 팀이구나, 하고 굉장히 기뻤어요. 그리고 제가 여기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것도 있어서 기합이 평소보다 더 들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리를 깨라!'를 피로하는 것도 오랜만이었고요.


사토 지금 생각났는데요, 홍백에서 센터였던 유이퐁(코바야시 유이)을 모두 둘러싸고 춤추고 있을 때, 유이퐁이 처음으로 소리쳤어요. 거기에 모두가 동조해서 '와앗!'하고 외쳤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지금까지의 라이브에서도 감각적으로 '지금 모두와 하나가 되었다'같은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과 같은 걸 느꼈습니다.


스즈모토 MV에서는 처음에 주변 사람들과 히라테가 소리친다고 할까, 서로 말하는 것 같은 설정이었어요. 그것도 있어서 라이브에서도 '유리를 깨라!'에서는 소리칠 때가 많아서, 음악방송이라면 반대로 소리치면 안될까,하고 저를 좀 억누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소리가) 나와버렸습니다.


사토 주위의 댄서분들도 '그 때, 소리를 하나가 돼서 내서 엄청 감동해서, 마음이 동요됐어'라고 말해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저희들의 감정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닿은 건 굉장히 기뻤어요.



- 참고로 각자 좋아하는 안무의 곡을 뽑는다면?


스즈모토 제 안에서 딱 떠오르는 건 '엑센트릭'이에요.


사토 저는 '후타리세종'의 발레 같은 동작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하기 쉽달까.



- 그럼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곡은?


스즈모토 '안비바렌토'요. 안무도 지금까지 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고 사비 부분도 동작이 빨라서요.


사토 저도 '안비바렌토'네요. 저 원래 양손 양발을 따로따로 움직이는 걸 잘 못 해서, 이 곡은 동작도 빠르고 더 복잡해서 제일 고전했었네요.



- 역시 '안비바렌토'인가요. 특히 이 곡은 높은 기술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에게 그 기술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 모티베이션이 되는 건?


사토 세계관이나 퍼포먼스를 좋게 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모두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서일까요. 그걸 제가 할 수 있게 되면, 전체적으로 질도 높아지고 좋게 보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못 하는 부분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입니다.



- 그것도 팀을 위해서네요. 스즈모토 씨는 어떻습니까?


스즈모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 그렇군요. 정말 심플하지만, 더욱 더 신념 같은 것이 느껴지네요. 좀 심술궂은 말이지만, 만약 케야키자카46을 졸업한 뒤에 댄서나 댄스 선생님이 되지 않으면, 앞으로의 활동으로 거기까지 댄스가 요구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열중할 수 있는, 진지해질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사토 모두 각자 생각하고 있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경우에는 "그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룹을 졸업해서 이걸 하고 싶다'는 것 보다도 우선 케야키자카46을 넓혀나가고 싶어요. 케야키자카46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좋겠다는 게 머리 속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저에게 득이 될까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일보다도 지금이 가장 중요해서.


스즈모토 저도 완전히 똑같은 생각이에요. 장래에 이렇게 되고 싶다든가 이런 걸 남기고 싶다든가, 그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은 케야키자카46이 어떻게 될지, 그룹이 제일(第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닛케이 엔터테인먼트! 2019년 5월호 케야키자카46 와타나베 리사, 코바야시 유이, 코이케 미나미, 하부 미즈호 (사진, 인터뷰 번역)



오역, 의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와타나베 리사, 코바야시 유이, 코이케 미나미, 하부 미즈호


네 명 모두 '할 수 밖에 없다'는 적극적인 분위기였다



18년 12월, 히라테 유리나가 부상으로 퍼포먼스를 동반하는 활동의 휴지를 발표. 그것으로, 코바야시 유이, 스즈모토 미유, 하부 미즈호, 와타나베 리사 4명은 연말연시 각 음악방송에서 센터를 교대로 맡게 되었다. 이 그룹의 위기에서 4명은 히라테와는 다른 센터상을 보여줬고, 케야키자카46를 지켰다. 또한 센터가 바뀔 때마다 그 멤버의 포지션에 들어간 코이케 미나미가 네 가지 안무 패턴을 외웠던 것 처럼, 전원이 센터를 지탱해줬고 케야키자카46의 끈은 더욱 공고해졌다.



- '안비바렌토'(18년 8월)의 센터를 네 명이 교대로 맡게 됐다고 들었을 때는?


코바야시 그 때까지 '안비바렌토'에서 히라테가 없었을 때는 포지션을 비워두고 퍼포먼스를 했어서 다른 형태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불안은 있었지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부 처음에는 놀랐지만 '2nd YEAR ANNIVERSARY LIVE'(18년 4월)에서 '엑센트릭'('불협화음' 커플링곡, 17년 4월)의 센터에 섰던 게 자신감으로 이어져왔고, 무엇보다도 '케야키자카46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타나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전원이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 안무 담당 TAKAHIRO 씨가 네 명 각자에게 맞게 댄스를 변형했다고.


안무에 담긴 의미


코바야시 오리지널 '안비바렌토'의 안무에는 히라테이기 때문에 담긴 의미나 스토리가 있어서, 다른 멤버가 해도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져요. 저희 각각의 이미지에 맞는 '안비바렌토'를 만들어주셨어요. 저의 경우에는 모두가 쓰러져 가는 걸 보면서도 그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안무였는데, '주위가 어떻게 되든 나는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었어요. TAKAHIRO 선생님 덕분에 센터에서도 너무 기죽지 않고 저 나름대로의 퍼포먼스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부 한명 한명에게 안무에 담긴 의미를 얘기해 주셨을 때, TAKAHIRO 선생님은 정말로 우리들을 제대로 봐 주시고 있다는 걸 느꼈고, '성공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와타나베 그렇게 TAKAHIRO 선생님과 제대로 얘기할 기회는 없었는데도, 저를 알아주셔서 감사했어요.



- 4인이 센터에 서면서 코이케 씨가 그 빈 포지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코이케 이야기를 들은 순간에는 '내가 들어가면 안 된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케야키자카46 전체를 생각했더니, 이것이 다른 멤버에게 가장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해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부 미이짱(코이케)은 정말 대단해요. 하나의 포지션에서 춤 추는 것만으로도 수십번 연습해야 하는데, 4패턴의 포지션을 외우다니. 어느 위치라도 대응할 수 있게 되어서 믿음직했습니다.



- 센터 4명을 코이케 씨를 비롯한 멤버들이 지탱해줬습니다.


와타나베 아카넹(모리야 아카네)의 '리사의 댄스 좋아해'라는 말이 힘이 됐어요.


코바야시 멤버들한테는 '2일 연속 센터가 됐으니까('빛나라! 일본 레코드 대상', 'NHK 홍백가합전'), 많이 나가게 되어버렸으니까 도와줘'라고 말했어요. 실제로 모두가 따뜻한 말을 해준 덕분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코이케 유이퐁(코바야시)은 거울 앞에서 진지하게 연습하고, 스스로와 마주보고 있었어요.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아서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16년 4월 데뷔 때부터 쭉 센터에 섰던 히라테 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나요?


와타나베 각자 느끼는 게 다를테니 100%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히라테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 압박감과 싸워왔구나 싶어서 새삼 존경스러웠어요.


코바야시 '레코드 대상'에서 '안비바렌토'의 퍼포먼스가 끝난 뒤에 '내일도 센터구나'라고 중압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히라테는 그런 환경에서도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었구나 싶었어요. 제가 이번 센터에 섰을 때 멤버들이 지탱해줬던 만큼, 저도 히라테를 지금까지보다 더 지탱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홍백'에서는 코바야시 씨가 센터로 '유리를 깨라!'(18년 3월)를 피로했는데, 애드리브로 소리치는 것 등에서 기백이 전해지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코바야시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해냈을 뿐인 부분도 있었는데, 그러면 전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이 무대에서 제 안에 있는 유리를 깨고 싶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멤버도 소리쳐줘서 모두와 공명할 수 있었네요.


코이케 유이퐁의 샤우팅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저도 소리쳐버렸어요(웃음).



가사의 의미를 공유하고 싶다


- 케야키자카46의 멤버들에게는 '그룹에 공헌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코바야시 들어주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곡이 많아서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다른 쪽을 향하고 '일단은'이라는 마음이라면 절대 닿지 않겠죠. 그 생각은 '사일런트 마조리티'(16년 4월)를 만나고 나서부터 계속 했어요. 그 가사의 세계에 공감하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하니까요.


와타나베 그 때 그 때 받는 곡들이 제 상황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어떻게 아는거지'라고 언제나 이상한 기분이 돼요. 곡이 저희들에게 조언과 격려가 되어서, 깨닫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코이케 지금까지 무언가에 몰두했던 적이 없었지만 케야키자카46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부 모델 일 등을 할 때도 항상 그룹이 있기 때문이라는 마음은 잊지 않아요. 그래서 케야키자카46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 3년간 쌓아올린 1기생의 연대가 강한 만큼, 2기생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죠.


코바야시 작년 말 음악방송에 몇 명이 '안비바렌토'에 참가해서 열심히 춤 추거나, 저희들의 폭포 수행에 눈물을 흘려준 2기생들을 보면, 같이 열심히 해줄 거라는 기대감이 들어요.



- 올해의 목표는?


코이케 화면 너머로도 봐주시는 분들에게 감정을 더 전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코바야시 다같이 작품을 만든다는 의식을 높이고 지금까지보다 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곡이나 라이브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와타나베 케야키자카46는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해야하지만, 그 생각만 앞서서 주위가 보이지 않게 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하부 올해는 연호가 새롭게 바뀌죠. 그런 해에 '케야키자카46'가 트렌드 워드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와타나베 리사 퍼스트 사진집 롱 인터뷰 번역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Risa Watanabe  Long Interview


와타나베 리사, 스무 살의 롱 인터뷰


더 많이 자신감을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전하고 싶은 것.


와타나베 리사는, 결코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다. 말하는 것 보다는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숨김 없이 말해준, 지금까지의 일.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계속 가보고 싶었던 동경하는 미국. 이번 여행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리벤지가 가능했습니다!



첫 사진집에서 처음으로 미국 상륙


사진집의 촬영이 행해진 곳은 미국 동해안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마이애미, 게다가 바하마의 수도 낫소와 엘세라 섬을 순회하는 "아일랜드 호핑" 로케. 기념할만한 1st 사진집의 발매. 그건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동경하는 장소였다'는 미국 상륙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다니던 고향의 고등학교에서는 수학여행으로 하와이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케야키자카46에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어서 도쿄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서, 결국 못 가서... 그 후로 계속 미국의 바다가 예쁘고 멋진 장소를 동경했었네요. 그래서 이번에 그 곳에 갔던 걸로 고등학교 시절의 리벤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 첫 미국의 감상은... 현지 분들이 모두 웃고 있었고 좋은 의미로 자기 고집이 있는 느낌이어서, 즐거워보였어요(웃음). 저는 일본에 있으면 아무래도 주위의 눈을 신경쓰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밝은 분위기에 도움을 받아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이애미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촬영했던 곳이 건물 전체가 핑크색인 햄버거 가게. 컬러풀한 거리에서 인스타에 올리기 좋을 것 같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엘세라 섬에서 만난 모래사장이 핑크색인 "핑크 샌드 비치"도 잊을 수 없는 경치 중 하나.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여행을 간다면 분명 몰랐을 장소라고 생각하고 "여기 오는 건 지금뿐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서 저도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가끔 그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힐링하고 있어요.


촬영 시간 틈틈이 옷이나 화장품 쇼핑, 게다가 음식도 마지막 날에 겨우 만끽.


저, 취미로 세계의 스타벅스 카드를 모으고 있어서 이번 여행에서 "마이애미"라고 써 있는 카드를 꼭 갖고 싶었어요. 최악의 경우에도, 기념품은 그것만 살 수 있다면 괜찮을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그 목표는 순조롭게 달성했습니다! 현지에 가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어서, 굉장히 기뻤어요. 계속 가고 싶었던 세포라(코스메틱 셀렉트샵)에도 갈 수 있어서, 밀크 메이크업(미국 브랜드)의 립과 하이라이터, 그리고 코디분이 알려주신 해외에서밖에 살 수 없는 브랜드의 립도 다섯 개 사버렸습니다! 다음에 언제 올 지 모르고 가지고 있는 립과 조금 색이 겹쳐도 괜찮잖아,라고 생각해서(웃음). 식사는 매일 촬영이 있어서 채소를 중심으로 요구르트나 치즈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날 낮에는 모든 촬영이 끝나고 배가 고파서 호텔 룸 서비스를 부탁했어요. 거기서 먹었던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룸서비스가 이렇게 맛있구나!"라고 감동하기도 했던 좋은 추억이. 게다가 밤에는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정말 좋아하는 새우도 만족스럽게 먹었어요. 오랜만에 여러가지를 섭취할 수 있어서 몸이 기뻐했습니다(웃음).


귀엽고, 멋지고, 천진난만한가 하고 생각하면 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른 모습이 보이는 이번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수영복 컷과 두근거리는 어른스러운 컷에도 도전했다.


다시 한번 사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고 나서, 저도 본 적 없던 표정이 많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생각하면 게임 센터에서 찍었던 사진은 꾸밈 없이 웃는다든가. 윙크하고 있는 사진이나 핑크색 벽 앞에서 찍은 얼굴 여덟 컷은 팬분들에게도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란제리 컷을 찍을 때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멋진 방의 분위기 덕분에 너무 긴장하지 않고 즐겁게 촬영에 임했습니다. 샤워 컷에 관해서는, 사실 처음에는 찍을 예정이 없었는데, 욕실 유리의 흐린 상태가 좋은 것 같아서 "아무튼 해보자!"라고 돼서(웃음). ...좋은 느낌이 되었나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괄량이이지만 사람 앞에 서는 게 서툴었던 어린 시절


1998년 7월 27일, 와타나베가의 장녀로 출생. 이바라키현의 자연이 풍부한 마을에서 강이나 논에 둘러싸여 자란 유소년기는 말괄량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때였을까요, 친구들 사이에서 신발에 붙어 있는 타입의 롤러 스케이트가 유행했어요. 저도 부모님이 그걸 사주셔서 자주 놀았습니다. 집 근처에 포장된지 얼마 안 돼서 매끈한 아스팔트 길이 좋아서, 어느 날 친구가 로프를 잡아당겨주면서 맹 스피드로 달렸더니, 도중에 제대로 넘어져서 폭풍눈물! 지금도 무릎에는 그 때의 상처가 조금 남아있을 정도로 큰 부상으로, 엄청나게 아파서... 생각만 해도 아프네요(웃음). 그 외에도 한눈 팔고 있다가 시궁창에 떨어져서 다치거나 자전거 바퀴에 발이 껴서 부딪히거나... 아무튼 상처가 끊이지 않는 아이였어요. 밖에서 노는 게 좋아서 소꿉놀이도 둑 같은 곳에서 했습니다. 그 근처에 나 있는 풀을 뽑아서 "스프가 됐어~"라든지(웃음). 사촌이 남자아이밖에 없어서 게임도 자주 했습니다. 다섯 살 때쯤에는 이미 오빠의 닌텐도DS나 플레이스테이션을 마음대로 빌려서 놀았으니까요. '나의 여름방학'이라는 게임을 좋아했어요. 게임 속에서 매미를 잡거나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주인공 남자아이의 여름방학을 진행해나갔어요. 또, 헬리콥터를 타고 무언가를 찾는 탈출 게임같은 것도 좋아했는데 제목이 생각이 안 나요... 당시에 다니던 보육원에서 기억에 남는 건 맨발로 뜰을 뛰어다니던 것과 진흙 경단 만들기. 3일이 걸려서 진흙 경단을 만들어서 친구들 중에 누가 제일 딱딱하게 만든지 승부를 겨뤘습니다. 시간 경과와 함께 변하는 수분량을 계산하는 게 포인트인데요 저는 잘하는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보육원에서는 거북이나 가재를 키우고 있었어서, 먹이를 주거나 수조를 청소하는 계도 있고 연장자가 되면 그걸 매일 바꿔서 담당해야 했어요. 생물을 돌보는 건 좋아했지만 가재의 알이 기분나빠서... 하지만 수조를 씻을 때는 가재를 일단 양동이로 이동시켜야 하니까, 그 때는 내심 좀 싫다고 생각하면서 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어쨌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던 아이였네요. 학예회에서는 눈에 띄는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무 역할을 하는 타입이었거든요.



연습도 상하관계도 엄격했던 중학교 배구부. 지금은 '엄격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웃음)



수많은 팬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 추는 아이돌이라는 현재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보육원 시절. 그것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고.


국어 수업 때 가끔 교실 앞에 나가서 이야기의 등장인물의 기분이 되어서 교과서를 읽어야 할 때가 있었어요. 저는 그게 정말 싫어서... 그룹별로 담당을 정할 때는 읽는 문장의 양이 가장 적은 역을 골라서, 얼마나 눈에 띄지 않게 할지 필사적이었어요. 쉬는 시간 같은 때는 항상 친한 여자 친구 3~4명이서 있었는데, 친구 사이에서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친한 그룹 안에서 갑자기 네잎 클로버 모티브가 유행했던 적이 있네요. 다들 필통이나 책받침같은 주변 물품을 클로버로 통일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 의문(웃음). 본가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면 분명 아직 그 편린이 남아있을 거예요... 그 후에 고학년이 됐을 때는 프로필장이 엄청 유행해서 저도 일단은 학교에 가져가서 교환했었네요. 황록색, 하늘색, 오렌지색같은 여성스럽지 않은 색도 인기여서, 부모님이 사주신 자전거도 하늘색이었어요. 주변 친구들도 좋아하는 색이 핑크인 사람이 없고 다들 시원시원한 느낌이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고향의 중학교에 진학. 연습이나 상하관계의 엄격함으로 교내에서도 1,2등을 다투는 배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학교 규칙으로 부활동은 꼭 해야해서, 처음엔 양 쪽 다 귀여운 선배가 있던 테니스부나 배구부 중에 고민했어요. 그런데 테니스는 야외에서 하니까 덥고 햇빛에 탈 것 같다고 생각해서(웃음) 배구부에 들어갔어요. 다만 결과적으로는 체육관에서 하는 배구도 푹푹 찌고 엄청 더웠지만요(웃음). 게다가 들어가기 전에는 배구부가 그렇게 하드하다는 걸 몰랐어서... 제가 있을 때에도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강한 학교였으니까 확실히 연습은 힘들었어요. 1학년은 누구보다 먼저 체육관에 가서 연습 준비를 하고, 끝나면 뒷정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게 대대로 내려오는 규칙. 힘들었지만 그래도 3년 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도중에 그만두면 고등학교 수험에 필요한 내신점수에 영향을 줄 거라는 불안도 있었고(웃음). 무엇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볼을 만질 수 있는 시간도 늘었고 2학년 여름에는 센터 포지션도 하게 돼서, 즐거운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네요. 인사의 중요함이나 주위를 신경쓰거나,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것도 부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연습도 상하관계도 엄격해서 좋았다고 생각해요(웃음). 연습은 토요일, 일요일에도 있어서 유일하게 놀았던 건 오전연습이 끝난 뒤의 휴일 오후. 그런 날엔 친구와 고향의 쇼핑몰에 놀러 가서 쇼핑을 하거나 포토 씰을 찍으면서 놀았어요.

2학년 쯤부터 주변에서 다들 서서히 화장을 시작해서, 저도 엄마의 화장품을 빌려서 본 대로 따라 해보기도 하고 친구한테 골라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패션잡지의 메이크업 페이지도 참고했고, 당시 즐겨 읽던 게 논노. 키리타니 미레이 씨나 사토 아리사 씨가 전속모델을 하고 있었고, 좋아하는 두 사람의 사진을 라인 프로필으로 해뒀어요. 옷도 그 때는 귀여운 테이스트나 파스텔 컬러 아이템을 좋아했고 INGNI이나 titty&Co., dazzling을 엄마가 자주 사주셨어요. 인생에서 제일 달콤한 옷을 입던 시기예요.(웃음) 공부는 평균을 내면 보통 정도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좋아하는 사회만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수학은 "어라?"하게 되는 완전히 문과여자였네요. 사회 중에서도 역사, 특히 옛날 사람이 지은 고대 건축물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를 여행하면서 눈으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고 싶어요.



충실한 "The JK(여고생)!"생활에서 뛰어든 예능계


고등학교는 교사(校舍)가 정말 멋지고 교복도 종류가 몇 가지 있어서 그 중에 자기가 커스터마이즈하는 게 가능한 타입의 학교였어요. 그 교복이 입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도 있는 것 같네요(웃음). 고등학교 생활은 엄청 즐겁고 충실해서, "The JK!"였던 하루하루. 부활동은 하지 않아서 방과 후에는 교복을 입은 채로 친구와 조금 도심으로 나가서 놀거나, 시험 전에는 스타벅스에서 공부하거나 했어요. 중학교 시절에 부활동 때문에 못 놀았던 만큼, 한번에 해방된 느낌이었어요(웃음). 항상 같이 있던 건, 6명의 친한 친구 그룹. 그 때까지 저는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 4명이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이 6명은 전혀 부딪히거나 한 적도 없었어요.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밥을 먹으러 가는 사이네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여고생. 그런 나날들에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케야키자카46(당시 토리이자카46)의 오디션을 보는 걸 추천해 준 게 계기였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응모해보는 건 어때?" 같은 가벼운 느낌이었다고 생각해요. 오빠에게도 "재밌을 것 같잖아!"라고 들어서 완전히 분위기와 기세로만 응모해버렸네요. 게다가 서류 심사의 응모 방법이 간단해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제 사진을 첨부해서 규정된 폼에 필요사항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것도 컸어요.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된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만들기. 초등학생 때부터 보육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 갈 학교를 어느 정도 정해서, 자료 청구도 끝내놨었어요. 그래서 서류심사에 합격하고 2차 심사의 통지를 받았을 때는 "왜 모르는 회사에서 편지가 온 거지?"하고 감이 안 왔을 정도로, (오디션은) 제 안에서 중요도가 낮았어요. 하지만 2차 심사에는 갔습니다. 이유는 귀찮은 마음보다도 "이런 오디션의 이면은 어떻게 되어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에요.

2차 심사에서 했던 건 자기 어필과 테스트 촬영. 머리를 예쁘게 말고 세련된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여자 아이들이 잔뜩 있는 가운데, 저는 데님 숏팬츠에 티셔츠라는 심플한 모습으로 가서 역시 조금 초조했습니다(웃음). 자기 어필에서는 다들 악기를 연주하거나 여러 특기를 보여주거나 했지만, 저는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끝... 역시 이걸로 이제 다음엔 불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3차 심사의 상세 정보를 알려주는 전화가 왔어요. 심사 내용은 가창 테스트와 노기자카46의 '태양 노크'의 사비 부분 댄스를 외워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비라고 하는 게 첫 번째 사비인지 오오사비인지 몰라서 "뭐 당일에 누군가한테 배우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들뜬 기분으로 회장에 갔습니다. 그 때는 아직 제가 합격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연습해서 완벽히 외워서 합격하자!"같은 마음까지는 아니었어요. 최종 심사. 후보자가 점점 줄어가는 가운데 일찌감치 떨어질 것 같던 제가 남아 있었고... 그래도 그 때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까지 남고 싶다"라는 마음이 싹트고 있던 것 같아요.



오디션 합격 후, 도쿄에 갈지 말지 고민했던 내 등을 밀어준 건, 친구의 말



최종 심사에서는 전 응모자 2만 2509명에서 22명의 합격자가 결정. 그 중에는 와타나베 리사의 모습도 보였다.


오디션을 보고 있던 건 응모하라고 추천해준 친구에게만 말했어서, 합격한 것도 학교에서는 그 친구밖에 몰랐어요. 합격한 후에는 항상 함께 지내던 친한 친구들에게 전학가는 건 말했지만, 한 달 동안 평범히 학교를 다니고 그대로 도쿄의 고등학교로 전학. 그 한 달 동안은 정말로 도쿄에 갈까 그만둘까, 사실은 꽤 고민했어요. 고등학교 생활이 정말로 즐거웠기 때문에, 일부러 그걸 버리면서까지 아이돌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는지. 하지만 거기서 등을 밀어준 것도 역시 그 친한 친구로 "모처럼 붙었으니까 일단 해봐".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도쿄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케야키자카46로 데뷔. 그저, 필사적이었다.


상경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어쨌든 레슨을 받는 매일매일. 댄스, 워킹, 모델, 노래, 연기... 요일마다 분야가 달라서 솔직히 이제 그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웃음). 지금이라면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아직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멤버끼리도 마음을 터놓지 못 하고 "이 애는 누굴까?"라는 상태. 새로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레귤러 방송 '케야키라고, 쓸 수 없어?'의 녹화가 시작되고 그라비아 잡지에 나오게 되면서 서서히 실감이 난다고 할까, "아이돌이란 게 이런 거구나"라고 조금씩 익숙해져갔고... 예를 들면 저녁인데도 "오하요고자이마스(아침 인사)"라고 인사하거나, 잡치 촬영 현장에는 많은 스태프 분들이 있고, 그 모든 분들이 저를 만들어 주시거나.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논노는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라고 감동도 했습니다.

멤버는 저를 포함해서 모두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에는 좀처럼 깊은 관계가 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레슨을 거듭하면서 점점 긴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2016년 여름에 멤버 전원이 출연했던 드라마 '토쿠야마 다이고로를 누가 죽였을까?'가 굉장히 컸달까. 아침부터 밤까지 다 같이 촬영했었기 때문에 휴식시간은 필연적으로 멤버끼리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아서 모두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던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드라마 방송부터 3개월 거슬러 오르면, 2016년 4월에는 케야키자카46의 데뷔 싱글 '사일런트 마조리티'가 발매. 초동 26만 2000장이라는 숫자는 오리콘 1위를 기록. 게다가 여성 아티스트 데뷔 싱글 초동 기록을 새로 쓴 케야키자카46은 더할 나위 없는 눈부신 스타트를 끊었다.


오리콘 1위라든지, 역대 1위, 물론 굉장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의 저희들은 무엇이 어떻게 대단한지를 몰라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친구나 주변 스태프 분들이 "좋은 곡이네"라고 말해주는 건 기뻤네요. 2016년은 그 뒤로도 2번째, 3번째 싱글을 발매하고 첫 원맨 라이브를 개최, 그리고 연말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 그 한창 때에 있던 저는, 그저 눈 앞에 있는 걸 필사적으로 해나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이 1년동안 인생의 모든 걸 경험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건 '홍백'에 대해선 극도의 긴장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나중에 방송을 다시 보고도 스테이지 위에 있는 건 내가 아닌 것 같고... 지금 그 때의 저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출연할 수 있으니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2016년 12월 31일의 저는 그렇게 말해도 절대 믿지 않을 것 같지만요(웃음).



모델 일이, 카메라에 대한 의식을 바꿔줬다


2017년의 와타나베 리사를 말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일 중 하나. 그건, 논노의 전속모델로 결정되어서, 케야키자카46에서 처음으로 패션지 전속모델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무소의 스태프 분으로부터 논노 모델 오디션을 받지 않겠냐고 들었을 때는 솔직히 "또 오디션을 보는 건가..."라고(웃음). 케야키자카46의 오디션에서 몇 번이나 저를 어필하지 않으면 안 됐던 괴로운 기억이 되살아나고 말았습니다. 논노의 오디션에서는 다른 응모자 분들이 논노 모델이 되고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마음가짐을 말하는 중에 저는 "논노 모델이 되면 케야키자카46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었네요. 지금 생각하면 논노를 발판으로...같은 실례인 발언이었다고 반성하고 있지만요(쓴웃음).

하지만 그 때는 "내가 논노 모델이 되는 게 케야키자카46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만 앞섰습니다. 그런 저를 논노 모델로 뽑아주신 편집부 분들에게는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해요. 합격했을 때는 계속 읽었던 잡지에 제가 나온다는 이상한 기분과 여러 옷이나 화장에 도전할 수 있다는 두근두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논노 모델이 되고 기뻤던 건 많지만, 그 중 하나가 전부터 동경했던 아라키 (유코) 씨와 1년 째에 같이 촬영했던 것! 게다가, 그 이후 촬영장이나 패션쇼에서 만나면 "릿짱"이라고 불러주시는 게 기뻤어요. 저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 아라키 씨와 고등학교 친구들 뿐이었습니다. 악수회에에 와주시는 여자 팬 분들이 많아진 것도, 정말 기뻤어요. "논노를 보고 좋아하게 돼서, 케야키자카46의 곡도 듣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오디션에서 말했던 게 조금은 실현되었구나, 싶었어요.



센터를 짊어질 수 없었던, 2017년. 이대로라면 "그룹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2017년 6월호부터 지면을 장식하게 되어서, 발군의 스타일과 쿨 뷰티 분위기로 바로 인기모델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모델 일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들 뿐이었다고.


어쨌든 포즈나 움직이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저 스스로도 "몇 번이나 똑같은 포즈를 하고 있구나"라고 낙담하면서도, 레퍼토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조금이라도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완성된 논노를 보고 다른 모델분은 저와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포즈를 하는지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다음 촬영에서 시험해봤어요. 그걸 반복해 가면서, 의외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범위보다 크게 움직이는 편이 좋구나, 라든지 카메라맨 분과 편집하는 분들이 "좋아"라고 말해준 동작은 나오는구나,라고 제 안에서 확인하거나.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점점 촬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델 일을 시작하고 제일 크게 변했다고 느끼는 건 카메라가 어렵다는 의식이 없어진 것. 원래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어렸을 때의 사진도 별로 남아있지 않아요. 케야키자카46도 그렇게 웃는 얼굴로 찍는 촬영이 많지 않은 그룹이어서,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 웃는 것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제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컸어요. 제가 웃는 얼굴을 보고 촬영 중에 텐션이 낮아지는 걸 피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 나오는 모니터를 보지 않았을 정도로(웃음).

하지만 2018년 정도부터는 의식을 바꿔서 다 찍고 난 뒤에 흘끗 한 번 보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의 각도나 방향에 따라 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쪽에서 찍힐 때가 많은지, 턱을 너무 드는 버릇... 막상 체크하게 되니 깨닫게 된 게 많았어요. 제 웃는 얼굴을 보고 위축되는 것도 없어졌고, 그 때의 표정을 받아들이고 다음 번에 살리게 된 것 같아요. 모델 일을 할 때, 웃는 얼굴은 옷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 지금의 목표는 아라키 씨 처럼 보시는 분이 밝고 힘이 날 수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사진은 정지화면이기 때문에 동영상에 비해 전해지는 정보량이 제한적이지만, 그만큼 포즈나 표정을 좀 더 연구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2019년 5월호에서는, 첫 단독 표지를 장식하게 된 것도 화제에.


패션지의 표지는 모델 일을 하는 이상, 누구나 한번은 동경하는 것. 2018년에도 한 번 니시노 나나세 씨와 투샷 표지를 했었는데, 그 때는 니시노 씨 덕분에 저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단독 표지의 꿈을 이뤘을 때는 전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었습니다. 표지 촬영은 다른 페이지 촬영을 하는 중간에 찍어서, 좋은 의미로 "표지!"라는 느낌이 없었어요. 의상이 평소 제가 입는 것 같은 파란 셔츠였기도 해서, 너무 긴장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센터 히라테의 부재를 지탱해준 친구의 존재


모델로서 순조롭게 활동하는 한편, 2017년에는 케야키자카46로서도 4th 싱글 '불협화음'을 릴리즈. 그 다음 날에는 데뷔 1주년을 기념한 라이브가 열리고, 여름의 야외 원맨 라이브 '케야키공화국2017'도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그 후 1st 앨범 '새하얀 것은 더럽히고 싶어져'의 전국 투어 중, 데뷔 때부터 센터를 맡아온 히라테 유리나의 컨디션 불량으로 인한 부재라는 긴급 사태가 발생한다.


리허설에서는 히라테가 히라테가 나오지 않는 경우를 대비해서 몇 명의 멤버가 대리로 센터에 설 준비를 했어요. 저도 한 곡을 담당하게 되어서 안무도 외웠는데, 막상 전체 리허설이 시작되서 서는 위치를 확인하니까 "나는 무리야"라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울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평소에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멤버인 후짱(사이토 후유카)도 울고, 이제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거기서 일단 스태프 분에게 히라테도 같이 멤버끼리만 대화하는 시간을 받았어요. 모두 여러가지를,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그 날은 결국 전원이 스테이지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공연은 역시 히라테의 컨디션도 돌아오지 못한 채로 계속되어서... 2017년은... 솔직히, 올해로 그룹이 끝나는 게 아닐까, 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전국 투어도 잘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보러 와 주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각 멤버가 많든 적든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낙담하고 있던" 시기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시기에도 제가 정신적으로 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향 친구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친구와 밥을 먹고, 실없는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케야키자카46이 아닌 저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서 파워를 충전하고 다시 케야키자카46을 위해 힘을 내고. 그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센터가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센터를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은 도망쳤던 센터와 마주한 뒤, 보였던 것


그리고, 2018년. 데뷔일인 4월 6일부터 3일 간, 케야키자카46의 '2nd YEAR ANNIVERSARY LIVE'를 개최. 거기서, 리사는 '피뢰침'과 '월요일 아침, 스커트를 잘렸다', 두 곡의 센터에 서게 되었다.


스태프 분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전년도 투어에서 할 수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해서 "이번엔 절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는 못 한다고 할 때가 아니야"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케야키자카46의 많은 곡들은 한 명의 주인공과 그를 지지해주는 사람이나 방관자들이라는 세계관. 그걸 더욱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퍼포먼스도 가사에 맞춰져 있어서, 충분히 곡의 세계관에 빠지고 정신적으로도 끌려가는 게 많습니다. 그만큼 들어주시는 분들에게 닿을 거라고 생각했고, 제가 그 주인공이 되기에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히라테의 과거 퍼포먼스는 전혀 보지 않고, 저 나름대로 노력하자고 생각하고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첫 센터. 그건, 그룹의 가운데에 서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해준 일이기도 했다.


그 경험은 저에게 정말 정말 컸어요. 느끼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센터라는 포지션은 주변에 그럴 생각이 없어도, 멋대로 멤버와의 거리를 느끼는 고독한 곳이었습니다. 데뷔하고 2년동안 그런 감정을 혼자서 끌어안고 싸워 온 히라테는... 대단해요.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을 깎아가면서까지 계속 서 주었구나, 라고. 실은 그 때, 히라테가 저희 집에 와서 둘이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히라테는 영화 촬영 중이어서 "촬영은 어때?"라고 물어보거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시시한 얘기를 하고 웃거나. 정말로 평범한,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지만 "계속 같이 활동했지만,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해에는, 연말 음악 방송에서 피로한 '안비바렌토'에서도 두 번째로 센터를 맡았다.


그 때는... 물론 긴장도 부담도 있었지만, 애니버서리 라이브에서 센터를 했던 만큼, 그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고 할 수 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른 프로그램도 포함해서 연말은 프론트 멤버 네 명이 센터를 돌아가면서 무대에 섰는데, 제가 아닌 멤버가 센터에 서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느낀 게 있었어요. 저, 그 때까지는 센터가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걸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역할은 절대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센터에 얹어주지 않으면 센터도 기분이 오르지 않는다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지지해주면서도 센터를 이끌어줘야 해요. 똑같은 "지지해준다"지만,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해야할까... 연말의 그 경험 속에서 저는 지금까지 센터를 지지해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룹 존속의 위기에, 센터라는 높은 벽. 괴로운 만큼 소중한 것을 깨닫고, 성장했다. 와타나베 리사는, 케야키자카46의 멤버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음... 뭐랄까, 뭐랄까요. 뭔가 "이걸 해 보고 싶다"는 게 구체적으로 보여지면, 일도 더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는 이걸 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자신이 있다면, 세계가 더욱 넓어지지 않을까요. 계속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걸 찾을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좀 더 제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자신감을 갖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 그리고 그 말 자체로 이전보다 좀 더 자신감이 엿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고 있는 걸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케야키자카46 활동을 하면서 전하고 싶은 건 말하는 편이 좋다고 느끼는 기회가 늘었어요. 그걸 조금씩 실천하고 있는 게, 자신감이 생겼다고 생각해주시는 요인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발언이 새로운 일로 이어지는 것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더 발신해 나가고 싶어요. 이 사진집도 그런 계기의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와타나베 리사는, 역시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말 하나하나에서 강한 의지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래도 역시 이때다 싶을 때는 노력이나 고민을 그저 숨겨버리겠지. 부끄러움을 잘 타던 소녀의 "과묵"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인함과 부드러움과 각오의 상징이 되었다. "과묵"한 그녀는 지금, 부드럽게 날아오르고 있다.

non-no (논노) 2019년 6월호 와타나베 리사




'SAKURAZAKA46 (KEYAKIZAKA46)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매거진 2019년 No.14 와타나베 리사  (0) 2019.03.25

EX대중 2019년 5월호 후지요시 카린 (사진, 인터뷰)


오역, 의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PROFILE

후지요시 카린

2001년 8월 29일생, 오사카부 출신. 케야키자카46 2기생. 오미타테회에서 '사일런트 마조리티'의 센터를 담당. 챠밍 포인트는 모찌모찌한 볼로, '케야키라고, 쓸 수 없어?'에서는 볼을 만지기 위한 선배 멤버의 행렬이 만들어졌을 정도. 4월 20일과 21일 (오사카), 27일과 28일 (도쿄)에서, 케야키자카46 2기생 '오모테나시회' 개최!






봄, 비치는 햇빛 속에

후지요시 카린



- 자주 욕조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오디션에서 선보였던 모리타 도지 씨의 노래도 불렀나요?


그건 안 불러요(웃음). 좀 더 밝은... 교가같은 걸 불렀어요.



- 교가! 언제부터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셨나요?


뭐랄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도 장래희망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었을 때, 사카미치 합동 오디션의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응모했습니다.



- 최종 오디션에서는 말 없이 체육앉기*로 앉아있었다고요.


긴장해서 서툴게 말하는 것 보다는 체육앉기로 앉아있을까 하고 생각해서요.


*체육앉기(体育座り) : 양 무릎을 세우고 양 팔로 무릎을 껴안는 앉는 방법.



- 그렇군요(웃음). 웃는 얼굴을 잘 못 한다고 하던데요.


촬영에서 웃는 얼굴을 요구할 때가 많아서, 주변 사람들은 잘 할 수 있는데 저는 할 수 없으니까 '아, 웃는 얼굴에 서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할 때 곤란하니까 집에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 멤버 앞이라면 자연스럽게 웃으시나요?


엄청 웃어요. 특히 타케모토 (유이)의 츳코미가 대단해서.



- 오미타테회에서 센터에 섰을 때, 타케모토 씨에게 격려를 받았다고요.


네.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말해줘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 오미타테회는 반응을 느끼셨나요?


실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나중에 영상을 봤을 때 '더 할 수 있지 않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멤버와 커뮤니케이션을 더 했다면 잘 되지 않았을까 하고.



- 오모테나시회에서의 리벤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번 다같이 이야기했을 때, 평소에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마음을 들을 수 있었어요. 오모테나시회에서는 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190409 메자마시테레비, ZIP! 와타나베 리사 cut (영상, 자막)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190409 메자마시테레비 와타나베 리사 cut






190409 ZIP! 와타나베 리사 cut







-

리사 사진집 대박나길 ( •̀ᄇ• ́)ﻭ✧

190413 야후 뉴스 와타나베 리사 인터뷰 번역



원문 : https://news.yahoo.co.jp/feature/1300


오역, 의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나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케야키자카46 와타나베 리사가 그래도 무대에 서는 이유

 

앞으로 나오겠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악착같이 하는 것에는 자신이 없는 것 같다케야키자카46 와타나베 리사(20)의 자기분석은 소극적이다. 케야키자카46의 주요 멤버로서뿐만 아니라 패션지 ‘non-no’의 전속 모델로서도 활동하는 와타나베. 동 잡지 5월호에서는 첫 솔로 표지를 장식하는 등, 독자의 지지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도 와타나베는, 어릴 때부터 변함없이 줄곧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서툴다고. 그녀는 왜 아이돌이라는 일을 선택해서 몇 만 명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걸까.



유명해지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유명해지고 싶다, 눈에 띄고 싶다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어요. 그런 제가 케야키자카46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니, 스스로도 놀라고 있습니다. 어릴 때 마음에 담아뒀던 미래와는 전혀 다르죠.’

 

노기자카46의 신 프로젝트로서 2015년에 탄생한 케야키자카46. 와타나베 리사는 그 초기 멤버로서 활동을 시작해, 현재 5년차. 두 번째 싱글 세계에는 사랑밖에 없어”(2016)이나 일곱 번째 싱글 안비바렌토”(2018)에서는, 센터 히라테 유리나 옆이라는 중요한 프론트 포지션을 담당했고, 올해 11일 방송된 “CDTV 스페셜! 송년 프리미엄 라이브”(TBS)에서는 부상으로 휴양 중이던 히라테 대신 센터 포지션을 맡는 등 그룹의 얼굴 중 한 사람으로서의 역할도 한다.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센터를 꿈꾸며 아이돌 세계에 발을 디딘 소녀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와타나베의 소망은 거기에는 없었다.

 

앞으로 나가고 싶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나 같은 게, 당치도 않다. 송구스럽다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런 성격이어서 사람들이 정말로 의욕이 있는거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요(쓴웃음)’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는 걸 싫어하고, 극도로 낯을 가렸던 와타나베. 그런 그녀가 꿈꾸던 장래희망은 보육교사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케야키자카46에 가입할 때까지, 보육교사 자격 취득을 전제로 진학을 생각했고, 그 이외의 진로는 머릿속에 없었다고. 실제로 아이 돌보기를 체험했을 때의 인상도 컸다.

 

평소엔 낯을 가리는 저도 어린 아이 상대라면 제가 먼저 말을 걸 수 있었고, 같이 밖에서 술래잡기를 하거나 방에서 종이접기를 하면서 굉장히 마음이 치유됐습니다.’

 

그러나 여름 방학의 추억 만들기의 하나로 재미로 응모했던 노기자카46의 신 프로젝트’(후에 케야키자카46)의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설마 합격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가 아이돌을 해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라고 와타나베가 회상했다.

 



너무 악착같이 하는 건 나답지 않다

 

눈에 띄는 것에 서투른 와타나베가, 결코 강한 동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아이돌 세계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미스매치인 직업선택이다. 애초에 빈번하게 열리는 악수회에서 처음 보는 팬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당황스러웠다고.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불식시켜준 것도 팬이었다고 한다. 팬이 먼저 말을 걸어주면서, 언제부턴가는 먼저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다.

 

딱히 낯가림을 극복하자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도 낯을 가린다고 생각하고, 제가 변했다는 의식은 없습니다. 만약 달라졌다면,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자연스럽게 뭔가 몸에 밴 것 같아요.’

 



3일간 45000명을 동원했던 케야키자카46의 야외 원맨 라이브 케야키공화국2018’을 비롯해, 수많은 무대도 경험. 지금도 눈에 띄고 싶다는 마음은 별로 없지만, 그녀 안에는 새로운 감정이 생겼다.

 

많은 사람 앞에서 뭔가를 하는 것은 아직도 서툴고, 눈에 띄는 건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라이브는, 리허설은 굉장히 힘들지만 본방이 끝난 뒤의 달성감이 커서 즐거웠다!”라고 생각하게 돼요. 회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여유나 자신감도 생겨서 지금은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으로부터 무언가 바꾸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고 와타나베는 반복한다.

 

물론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했을 때 더 스스로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너무 악착같이 하는 건 제가 아닌 것 같아요. 팬분들은 꾸밈없는 저를 좋아하게 되어주시면 좋겠고, 1년 정도의 활동에서 자신감이 생겨서 나는 나답게 있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이렇게도 웃는구나

 

노기자카46 시라이시 마이의 세컨드 사진집 패스포트”(코단샤)가 중판을 거듭해 현재 누계 발행부수는 35만부를 돌파. 같은 노기자카46 이쿠타 에리카의 세컨드 사진집 인터미션”(코단샤)30만부에 이르는 등, 아이돌 사진집은 일종의 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노기자카46과 같은 사카미치 시리즈에 속하는 케야키자카46의 멤버 와타나베의 첫 사진집 과묵”(슈에이샤)도 이달 10일에 발매되었다. ‘초판 13만부라는 숫자는 퍼스트 사진집으로서는 사카미치 시리즈 최다.

 

‘“과묵이라는 타이틀은 굉장히 저다워서 마음에 듭니다. 이런 타이틀이어서 쿨한 사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팝하고 컬러풀한 컷이 많아서, 좋은 의미로 놀라지 않을까 싶어요.’

 

과묵이라는 타이틀처럼 와타나베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캐릭터로, 버라이어티 방송에서도 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많다. 그러나 미국 마이애미와 바하마의 밝은 태양 아래서 촬영한 사진집에 수록되어 있는 건 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웃는 얼굴이고, 의외의 인상도 받는다.

 

저 스스로 촬영은 쿨한 표정을 짓는 게 편하다고 계속 생각했어서 이번에 , 이렇게 웃기도 하는구나라고 저에게도 새로운 발견이었어요. 특히 게임센터에서 즐기고 있는 컷은 평소에 친구와 같이 놀고 있을 때의 느낌으로, 좋은 의미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부분은 꼭 주목해주시면 좋겠고, “나한테 이런 일면도 있구나라는 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눈에 띄는 게 서투른 와타나베다. 솔로 사진집 발매에 있어서 나 같은 게라는 심정이 되지는 않았던 걸까.

 

그런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고, 봐주시는 분이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팬분들이 악수회에서 계속 사진집이 나오면 좋겠어라고 많이 말해주셨어요. 그래서 사진집의 발매가 정해지고 겨우 하나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이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과묵은 응원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보답이라는 마음도 가득합니다.

 


맞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와타나베가 소속된 케야키자카46은 현재 변화를 마주보고 있다. 그녀와 동기인 1기생에서 졸업하는 멤버가 나오고, 또 지난해 11월에는 오디션으로 선택된 9명이 새로 2기생으로 가입해 멤버 구성이 크게 변했다.

 

신 멤버 가입으로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날까. 2기생 멤버 중에는 세키 유미코와 마츠다 리나처럼 우리(2기생)을 팬분들이 받아들여 주실지 걱정이다라고 불안을 토로하는 멤버도 있다.

 

와타나베는 그 부분은 안심해줬으면이라고 온화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희(1기생)도 처음에는 노기자카46분들에 이어 사카미치 시리즈 제2으로 데뷔했고, 똑같은 불안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주었습니다. 게다가 2기생이 들어와 준 것이 1기생에게는 자극이 되고 있고, 깨달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케야키자카46이라는 그룹을 더 고조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이돌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3년 반이 지났다. “과묵하고 낯을 가리는 면이 유년기부터 지금까지도 변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통해 성취의 기쁨을 알고 경험을 거듭하면서 어느 때보다 자신감도 느낀다.

 

아니요, 지금도 (아이돌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웃음). 다만 평범한 여자아이라면 경험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응원하는 편지를 받거나 많은 분들이 악수회에 와주시는 것도 저의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non-no”의 일을 통해서 독자인 여자아이가 제 사복이나 화장을 따라해주거나, 저를 동경해서 머리를 잘랐다고 말해주는 게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 기쁨이 있어서, 저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