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KURAZAKA46 (KEYAKIZAKA46)

의역, 오역 주의

 

 

 

“이토하가 동급생이라 정말 다행이야”라고 등교할 때마다 말했어요 (마토노)

 

“미오랑 내 콤비, 최강 아냐?!”라고 둘이서 말하면서 하교했어요 (무카이)

 

 

마토노상이 블로그에 고등학생인 채로 있고 싶은 건 아니고라고 쓴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그건 어떤 심경이었나요?

 

마토노 그건... 어떤 날들이라도 끝이 있기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서요.

무카이 뭐야 그거, 멋있어~! 그래도 확실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다면 있네요...

 

3월 초의 미트&그리트에서 두 분이서 교복을 입었는데요, 그 생각은 무카이상이 했나요?

 

무카이 같이 하자고 한 건 저인데요, 팬분들이 미그리에서 교복 입어주면 좋겠어라고 해주셔서요. 그래서 고등학생 마지막이라는 걸로 서로 좋아하는 교복을 입자고 했어요.

마토노 저는 실제 학교생활에서는 세일러복밖에 없어 본 적이 없어서, 블레이저나 넥타이나 체크 무늬 치마를 동경했어요. 그래서 그런 코디가 되었는데요, 미그리 전날에 급하게 사러 갔네요(웃음)

무카이 저는 중고등학교에서 세일러복도 블레이저도 입었고 리본도 넥타이도 해본 적이 있어서, 제가 좋아하는 캐쥬얼한 JK 스타일을 구현한 느낌이었어요.

 

이번에는 같은 고등학교의 등하교 풍경이라는 상황이었는데요, 실제로 같은 반 친구시죠.

 

무카이 맞아요. 반에서도 몇 갠가 그룹이 있는데요 저와 미오는 학교에서도 둘이 꼭 같이 지냈어요(웃음)

마토노~속 붙어있었지(웃음)

무카이 정말 같이 등교하고 같이 하교하고

마토노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가는 것도 같이

무카이 학교 친구가 미오밖에 없어서요

마토노 둘다 아싸여서요... 그래도 이토하가 있어 줘서 저한테는 최강이었어요.

무카이 미오랑 내 콤비, 최강 아냐?!”라고 둘이서 말하면서 집에 갔었어(웃음)

마토노 맞아 맞아. “최강이라고 말했어

 

두 분이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요...?

 

무카이 제가 잘 못 하는 부분은 미오가 채워주고, 미오가 못 하는 부분은 제가 채워줄 수 있어요.

마토노 확실히, 확실히! 예를 들면... 저희 이외의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에 말을 걸러 다가갈 수 있는 건 전데요, 친구가 되고 나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서 분위기를 살려 주는 건 이토하거든요.

무카이 둘이서 하나가 된다면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겠네 하고 하이파이브를 한 적이 있어요

마토노 이토하와 있을 때는 인싸가 될 수 있고요

 

마이너스끼리 곱해서 플러스가 되는 것 같이요.

 

무카이 정말 그래요. 미오랑은 3기생 중에서도 일찍부터 친해졌고요.

마토노 이토하랑 좋아하는 게 똑같았어서요.

무카이 그리고 얘기할 때의 텐션이나 웃음 포인트도 똑같네요, 미오랑 이토하는요. 주변에서는 뭐가 재밌는 거야?”같이 생각하는 것도 미오랑 저한테는 웃기다든지(웃음)

마토노 식생활도 비슷해서, 내장의 느낌같은 것도 아마 이토하랑 닮지 않았을까요

무카이 아마 배를 열어보면, 둘다 같은 구조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먹는 걸로 말하자면, 3기생이 엄청나게 아사이볼에 빠져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미오랑 시즈키랑 저는 그때 안 빠졌어요. 이 세 명은 어느 쪽이냐고 하면 건강식품보다도 정크푸드를 좋아해서요(웃음)

마토노 아마 안 빠질 거야 라고 말했어요

무카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른 동기들보다 꽤 늦게 둘 다 같은 타이밍에 아사이볼에 갑자기 빠졌어요

마토노 설마의, 동시 타이밍에(웃음) 그래도 죄책감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똑같이 생각할 때도 많아요.

무카이 어라, 그거 신경 쓰였지?”하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을 때가 많아요.

마토노 저번에는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버블티를 마시고 있었어요. 심지어 분 단위까지 일치했어요!

무카이 그건 역시 조금 무서웠네요.

마토노 무서웠어(웃음). 그런 느낌으로 식생활의 취향이나 리듬까지 닮은 둘입니다.

 

여러 가지가 닮은 두 사람인데요, “좋아했다라거나 특기인 과목은요?

 

마토노 저는 미술이나 영어일까요. 이토하는 그거지? 물리지? , 생물인가

이토하 생물. 동물을 좋아했어서 여러 가지를 조사해서 깊게 알아가는 게 즐거웠어요. 공부라는 느낌이 아니고 머리에 들어온다는 느낌이었어요.

마토노 바로 이해되는 느낌?

무카이 응응, “어떤 동물은 이렇고, 이 식물과의 차이점은 이렇고,” 같은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계속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어.

마토노 유전자 같은 것도 관심 있어?

무카이, 엄청 좋아했어. 아마 생물은 반에서 제일 성적 좋았다고 생각해!

마토노 나도 미술은 학년에서 1등이었지만... 블로그에 올린 그림은 디지털로 그렸으니까 그건 꽤 잘 나온 느낌이 있어.

무카이 그래도 대단해. 나는 예술 교과 선택 수업을 미술을 잘 못 하는데도 골라버려서, 너무 못해서 친구들이 웃더라고(웃음). 뭔가 근거도 없이 그렇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없겠지하고 생각했더니 잘하는 사람밖에 없어서 엄청 초조했다구

마토노 잘 그리는 사람을 미술을 고르겠지(웃음). 그래도 내가 성적이 제일 좋았던 건 영어야. 국어가 괴멸적으로 전혀 안 돼서, 학원에 다녔던 수학이랑 영어로 그럭저럭 버텼던 거 같아.

무카이, 영어를 전혀 못 했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한테 어떻게 외우냐고 물어봤더니 , 감각.”이라고 하더라고.

마토노 맞아, 영어단어는 일본어로 번역하지 않고 외워지는 거라고, 내 감각으론 그래서. 예를 들어 Apple이라면 ‘=사과라고 외우는 게 아니라, 사과의 이미지랑 직접 연결시키는 느낌.

무카이 그런 발상을 하는 게 정말 대단해.

마토노 어제도 왠지 성장이라는 말이 안 나와서. 머릿속에서는 “growth”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무카이 그런 감각은 안 생길 것 같아... 사실 영어는 제일 점수가 낮았기도 하고

마토노 나도 국어가 정말 끝이었으니까

 

이제 정기 시험으로 고통받을 일은 없지만, 좀 그립기도 하나요?

 

무카이 그게 정말 행복하기만 해서요(웃음)

마토노 기쁘지만 그립...지도 않은가(웃음)

무카이 시험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배우는 것의 즐거움은 느꼈으니까요

마토노 앞으로는 자유롭게 좋아하는 걸 공부할 수 있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무카이 그래도 미오는 공부 안 해도 시험에서 점수 잘 나왔으니까~ 내가 엄청나게 공부해도 전부 미오가 점수 더 높았잖아

마토노 아냐 그건, 감으로 맞춘거야.

무카이 감으로 맞춘다니 그거 대단한거야

마토노 아니아니아니... 적당히 해봤더니 우연히 맞은 것 뿐이니까

 

마토노상의 네거티브 모드가 발동될 것 같으니까 화제를 바꿔보죠(웃음). 드디어 고교생활도 끝나는데요.

 

무카이 이제 학생할인 못 쓰게 되버렷~!

마토노 영화 요금이 올라버려

무카이 최근에 학생할인 얘기밖에 안 해요(웃음)

마토노 꽤 절실한 문제니까.

 

혹독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웃음). 그럼 곧 들어오는 4기생한테 뭐라고 불리고 싶은지 발표해볼까요.

 

무카이 저는 이토짱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남동생이랑 여동생한테도 이토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고향 후배들이 이토짱상이라고 불렀으니까 가능하다면 둘 중 하나로. “무카이상은 뭔가 거리감이 느껴져서 이토짱이 좋아요.

마토노 이토하짱이나 이토하?

무카이 스태프분들이나 선배, 연상인 동기가 이토하라고 부르는 건 괜찮지만 후배한테 이토하상이나 이토하 선배라고 불린 적은 없어서, 위화감이 있을지도.

마토노 확실히 이토짱은 귀여운 느낌이야. 난 뭘까... 의외로 뭐든 괜찮으려나. “라멘상이나 레고상이라도 부르기 쉬운 거면 완전 괜찮아.

무카이 아니 레고상은 아니지(웃음)

마토노 특별히 고집하는 건 없어. 원한다면 마토노상도 괜찮고 마토미같은 것도.

무카이 마토미귀엽다. 미오는 고향에서는 어떤 느낌으로 불렸었다고 했지?

마토노 마토노나 미오마가 많았으려나.

무카이 맞다, “미오마. 그것도 돼?

마토노 된다기보단, 뭐든 괜찮아(웃음)

무카이 그렇구나(웃음). 나는 4기생이랑 만나면, 그 장소에서 이토짱이라고 불러줘라고 말할 생각이야. “하부짱(졸업한 하부 미즈호)”처럼 침투했으면 좋겠어서.

마토노~ 이미지 알 것 같아.

 

선배가 된다는 건 더 이상 최연소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기도 한데요.

 

마토노 저는 조금 기쁘기도 해요. 최연소를 경험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무카이 미오랑 저는 최연소감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좀 관계가 있어서요. 3기생은 의외로 다들 응석받이라서 저희한테 연하라는 느낌도 딱히 없고요.

마토노 동기 중에 연상 멤버나 선배분들한테는 응석 부리기도 했지만 원래 성격적으로 응석 부리는 느낌은 아니어서, 최연소가 아니게 되는 것에 대한 미련은 없을지도요.

 

반대로 4기생은 귀여워해주실 건가요?

 

마토노 저는 그런 방면의 커뮤니케이션을 잘 못 해서,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무카이 저는 동생들도 있어서 둘 중에 고르면 연하 쪽이 말하기 쉬울지도 모르겠어요.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을지는 만나보지 않으면 아직 모르겠지만 많이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마토노 동갑이랑 연하인 아이뿐만 아니라, 조금 연상인 후배가 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2기생분들 중에는 연하인 선배가 없어서,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기도 해요.

무카이 후배라도 연상이면 우리보다 인생 경험이 기니까 우리가 후배 같은 느낌일 것 같지 않아?

마토노, 4기생에 스무살인 멤버가 있다면 18세인 우리한테는 역시 어른으로 보이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네.

 

두 살차이는 의외로 크죠. 마토노상과 무카이상도 만난지 2년이 되어가는 동안 변화나 성장을 하기도 했을거고요.

 

마토노 그래도 성장했는지 어떤지는 자기 자신은 모르고, 이토하와도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서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별로 객관적으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카이 미오랑은 거의 매일 같이 있어서요. 그래도 외모는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그리고 3기생 모두 정신적으로 안정되어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건 성장한 거 아닐까요.

그로 인해서 자신이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돼서 멤버에게 상담할 수 있는 것과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하는 것이 좋은 걸 구분할 수 있게 된 건 크다고 느끼고 있어요.

마토노 멤버 각자 자라온 곳이나 환경이 다르잖아요. 그래도 이 2년간 같이 지내면서 좋은 느낌으로 익숙해졌다고 할까요, 둥글게 변한 느낌이 들어요.

 

이렇게까지 깊게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항례의 질문입니다만, 고등학생으로서 하지 못하고 남은 것이 있나요?

 

마토노 저는 중학교 때부터 생각해보면 의외로 학생 때 하고 싶었던 건 거의 다 했어요. 집 가는 길에 프리쿠라를 찍거나 버블티를 마시거나 뭘 사거나 학생식당에 가거나 다 해서, 후쿠오카에서의 중학교~고등학교 생활은 꽤 충실하게 여러 가지를 했어서 끝나는 건 아쉽지만... 이 정도로 괜찮지 않나 싶어요.

무카이 저도 뭔가 고등학생 기간동안 이거 하고 싶어라고 생각한 게 별로 없었기도 하고 히로시마의 고등학교에서는 가능하면 별일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방과 후에 슈퍼에서 빵을 사서 돌아가거나 혼자서 이것저것 했어요. 게다가 상경하고 나서는 미오랑 둘이서 있는 게 즐거웠기도 하고요.

마토노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맥도날드도 가고.

무카이 체육대회가 끝난 뒤에 야끼니꾸 먹으러 가기도 했지. 행사 끝나고 뒤풀이 같은 건 참여해본 적이 없어서 미오랑 뒤풀이를 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마토노 갈비 엄청 먹었었지(웃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우리.

무카이 변하지 않지 않을까? 계속 별거 아닌 걸로 웃을 것 같은 느낌이야(웃음). 말없이 있어도 편한 친구는 미오가 처음이니까, 정말 사쿠라자카에 들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마토노 나도 이토하가 동급생이라 정말 다행이야.

무카이 그거, 학교갈 때 매일 들었어(웃음)

마토노 둘다 서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항상 얘기했었잖아.

무카이 뭔가... 졸업이 아쉬워졌을지도 모르겠어.

 


 

둘다 고등학교 졸업 정말 정말 축하해❤

생각보다 뭐랄까 정말 JK 같고 둘이 진짜 친한 게 보여서 너무너무 귀여운 인터뷰🥰

미오 토하 콤비 최강 맞아👍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모리야 레나 1st 사진집 <笑顔のグ-、チョキ、パ-> (웃는 얼굴의 묵찌빠)

 

레나아 스페셜 인터뷰~

 

진심 어린 미소를 잔뜩 담은 소중한 한 권이 되었습니다

 

촬영 마지막 날, 레나 씨가 ‘인생의 보물이 될 수 있는 한 권으로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한 1st 사진집 ‘미소의 묵찌빠’가 드디어 발매되었습니다! 완성된 지금의 기분을 알려주세요.

 

사진의 베리에이션이 정말 풍부해서 보면서 질리지 않는 한 권이 되어서 기뻐요. ‘토끼 귀를 써보고 싶다’라든지, 제가 해보고 싶던 것도 넣을 수 있어서 대만족인데요… 사주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그것만큼은 조금 걱정이에요. 그래도 이 사진집을 계기로 좀 더 많은 분들이 저를 알아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사진집을 발매한다는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사쿠라자카46의 라이브가 끝나고 나서 스탭분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깐 와주세요’라고 부르셨어요. 거기서 ‘사진집을 발매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전달받았는데요. 너무 생각지도 못해서 처음엔 ‘정말 저인가요?’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귀여운 여자아이의 사진집을 보는 걸 좋아해서 선배님의 사진집을 산 적도 있지만, 제가 사진집을 내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서 정말 놀랐어요. 기쁜 것보다도 ‘설마 내가…’라는 기분이 컸네요.

 

알게 된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을 알려주세요

 

가장 먼저 보고한 건 어머니였어요. 좋아하시긴 했지만 그 직후에 바로 ‘괜찮은 거야?’라고 걱정하시기도 했네요(웃음). 그 후에 아버지와 오빠에게도 보고했는데 두 명 모두 ‘에, 레나가?!’라며 어쨌든 놀랐어요. 멤버들은 모두 ‘수영복 기대돼!’라고 그 얘기만 해서(웃음). (와타나베) 리사 씨나 마츠리짱 (마츠다 리나), (야마사키) 텐짱한테 특히 놀림받았던 것 같아요. (오오누마) 아키호와 (마스모토) 키라의 2대 대 불가사의 콤비는 ‘열 권 살게’라고 얼렁뚱땅 얘기했어요. 그렇게 말했으니까, 꼭 사줘야 돼♡

 

사진집 촬영을 위해 준비했던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몸을 열심히 만들었어요. 여성스럽고 유연한 바디 라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 촬영 3주 전부터는 헬스장에 다니면서 트레이닝을 시작했어요. 살찌는 것도 그렇지만 너무 마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 딱 좋은 찾는 게 어려웠어요. 트레이닝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식생활도 조절했어요. 정말 좋아해서 매일 먹던 초콜릿은 칼로리도 지방질도 높기 때문에 참기로 했어요. 일하면서 한입만 먹은 적도 있는데, 그 외에는 (초콜릿과) 3주간 헤어지는 게 처음이어서 정말 괴로웠어요… 그래도 먹고 싶어지면 ‘지금을 극복하면 로케 장소의 이시가키 섬이나 나가사키에서 무조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분발했습니다. 집에서나 일할 때 비는 시간에는 저 나름대로 포즈도 연구했어요. 선배님의 사진집이나 잡지를 많이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 포즈를 저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분명 어색했겠지만요… 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촬영할 때의 추억을 알려주세요

 

제가 도쿄 출신이어서 도쿄에서도 촬영을 했고, 지방 로케에서는 이시가키 섬과 나가사키에서 촬영을 했는데요, 다 전부 즐거워서 정말 계속 웃었어요. 날아갈 듯한 강풍 속에서 일본 서쪽 끝에 갔던 것도 귀중한 체험이었고, 해변에서 탔던 말도 귀여웠어요♡ 이시가키 섬에서 촬영할 때는 빵이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요, 다 맛있어서 행복했어요. 나가사키의 호텔에서 먹었던 부야베스 짬뽕과 부르기뇽(이름이 이게 맞을까요?)도 일품. 나가사키 명물인 카라스미(염장한 숭어알)는 다음날 부을까봐 걱정돼서 꾹 참았던 건 조금 아쉬움이 남네요. 오키나와의 슈퍼에서는 지마미 두부를 샀는데요, 너무 맛있어서 푹 빠져버렸어요. 촬영 마지막 날, 스탠다드 푸들을 만났던 것도 좋은 추억…. 헤아리자면 끝이 없네요. 촬영 기간 중에는 거의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촬영을 했지만 피곤하거나 졸린 것보다는 즐거운 기분이 더 커서, 힘들었던 기억이 없습니다(웃음).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찍히는 게 즐거워져서 종반에는 ‘아, 벌써 끝나는구나’하고 슬퍼졌어요.

 

처음으로 수영복이나 란제리에도 도전했는데요, 긴장했나요?

 

의상 피팅 때는 부끄러웠는데요, 수영복을 입고 눈앞에 해변이 있으니까 ‘와~ 바다다~♡’하고 텐션이 올라서 부끄러운 마음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요. 그건 저 스스로도 놀랐어요. 란제리 사진도 스탭분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셔서, 많이 웃고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의상에 대한 요청사항도 말하고 ‘이런 수영복이나 란제리를 입어보고 싶어요’라고 전했더니 그 취향을 반영해 주셔서 매우 기뻤습니다.

 

사진집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컷을 알려주세요.

 

모든 장면을 다 정말 좋아하는데, 하우스텐보스의 튤립 밭에서 촬영했던 핑크 드레스 컷은 특히 마음에 들어요. 이 드레스는 피팅 때부터 너무 귀여워서, 바로 결정했던 옷이에요. 그리고 역시 토끼 씨♡ 스타일리스트분한테도 ‘토끼짱이 되고 싶다’고 전달했더니 토끼 귀와 부드러운 옷을 준비해 주셨어요. 꿈을 이룰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깅엄체크의 비키니 장면에서 은 대야 안에 웅크리고 앉았어요. 수영복을 입고 대야에 들어가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기도 하고, 앞으로도 평생 없을 것 같아서, 최고의 추억(웃음). 스탭분들과 모두 같이 보면서 몇 번이나 웃었어요. 뭔가 기회가 있다면 여러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사진집 촬영 중에 모래사장에서 자연스럽게 ♡를 그리고 있었네요(웃음)

 

아하하, 그렸습니다♡(웃음)

 

그룹에서도 완전히 부릿코 캐릭터로 정착했는데요, 레나 씨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괴롭혀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그룹에 막 들어갔을 때는 ‘뭐라도 좋으니 캐릭터를 만들어야만!’하고 초조해하던 시기도 있었는데요, 정신 차려 보니 부릿코 캐릭터가 되어있어서. 저한테는 조금 예상 외였지만, 멤버들이 장난으로 부릿코를 하고 있는 저를 따라 해주는 일도 많아져서, 그걸 보는 게 즐거워요.

 

“레나아”라는 별명도 정착되었는데요. 마음에 드나요?

 

처음에는 “레나-”라고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소코사쿠(거기 돌면, 사쿠라자카?)”에서 하라이치 사와베 씨가 저의 그 발언을 잘못 들었던 것을 계기로 “레나아”가 조금 이상한 억양으로 정착되었을 때 ‘정정할까’라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지금은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름만 부르는 것보다 허들이 낮아지고 선배님들도 친근하게 불러주셔서, 다행이에요♡

 

 

가족들이 등을 밀어준 것이 아이돌이 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연수생부터 시작해, 3rd 싱글 ‘오월비여’에서는 사쿠라에이트로 대발탁. 사쿠라자카46에서의 활동도 매우 충실하네요!

 

덕분에요, 네. 사쿠라에이트는 많은 곡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가장 기뻤어요. 녹음도 MV 촬영도, 조금 서투른 안무 외우기도. 다 같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겁고, 정말 좋아요. 센터가 되고 싶다든가 포지션에 대한 고집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물론 전력을 다해 달려나가고 싶고,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면 위를 목표로 하고 싶다는 것은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주어진 것 이상의 노력을 발휘하는 것이 매일 저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는 목표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돌이 되는 게 꿈이었나요?

 

그게, 그런 건 아니에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이나 ‘키라링☆레볼루션’ 등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을 자주 불렀던 기억은 있어요. 처음 사주셨던 CD도 분명히 ‘키라링☆레볼루션’ 관련이었던 것 같은데, 가사지를 보면서 제대로 연습하거나 했지만 당시,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유치원에 다녔을 시절부터 계속 보육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만 꿨어요. 중학교 수험을 봤는데 그때도 보육교사를 목표하기 좋을 것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일관 학교를 선택했고, 대학교도 보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유치원을 다녔을 때 담임선생님이 너무 좋았어요. 항상 웃는 얼굴로 저희와 같은 시선이 되어서 함께 놀아주셨던 선생님으로, 저도 언젠가 그런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이 유치원을 그만두셨을 때, 너무 슬퍼서 엄청 울었던 건 지금도 엄청 잘 기억하고 있어요.

 

거기서부터 갑자기 바뀌어서, 사카미치 합동 오디션에 지원하겠다고 생각한 계기를 알려주세요.

 

엄마와 오빠가 인터넷에서 찾아서 ‘이런 것도 있네’하고 알려주셨어요. 오빠가 원래 케야키자카46의 팬이었던 것도 있고, 저도 TV에서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을 보면서 어딘가 동경하고 있던 것도 있었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계속 보육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설마 제가 오디션을 보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응모용 사진을 엄마가 수동 카메라로 찍어주셨는데 친구랑 놀고 돌아와서 기일이 촉박하다는 걸 깨닫고 급하게 찍어서, 급하게 찍은 분위기가 나와버렸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 사진으로 세미나에 응모했더니 추첨에서 당첨되어서, 무려 그 후에 대학 입학식과 세미나가 겹쳐버리는 사건이 발생. 둘 다 같은 4월 1일이었어요. ‘어떡하지…’ 하고 고민하다가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대학 입학식에 갔습니다. 그 후에 오리엔테이션을 패스하고 중간에 나와서, 세미나로 급하게 갔어요. 조금 늦었지만 어떻게든 맞춰서 세미나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에서는 스탭분이 손에 든 자료를 보면서 한 명 한 명 체크해서 ‘뭘 보고 계시는 걸까’하고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귀여운 복장이었는데, 저만 입학식에서 돌아와서 정장을 입고 들떠있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긴장되었습니다. 그 세미나의 마지막에 사진을 찍었는데 ‘나만 정장…’이라는 게 걸려서,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세미나가 끝나고 ‘1차 오디션은 면제입니다’하고 연락이 와서, 오디션 시드권을 받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저 놀랐습니다.

 

 

오디션 중에는 긴장하고만 있었을 뿐

하지만, 의외로 배짱이 있었을지도?!

 

오디션을 위해 준비했던 게 있나요?

 

노래 심사를 위해 노래방에 계속 다녔어요. 혼자 가는 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에 엄마에게 부탁해서 같이 갔어요. 첫 심사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꼭’을 골랐습니다. 엄마가 자주 부르는 걸 많이 들어서 저도 좋아하게 됐습니다. 참고로, 이 곡은 심사에선 아카펠라로 불렀습니다. 정말 정말 긴장했어요. 최종 심사에선 오오하라 사쿠라코 씨의 “눈동자”를 불렀는데 이 곡은 꽤 열심히 연습했어요. 엄마한테도 조언을 많이 받았습니다. 객관적이 되어보자고 생각해서 제 노래를 녹음해서 듣고 ‘전혀 안 돼’라고 우울해하거나, 어쨌든 필사적이었어요.

오디션에 참가하는 아이들은 다들 정말 귀엽고, 대기실에는 오디션에 익숙한 것 같은 아이들이 많아서 계속 ‘하…’하고 압도당했어요. 어느 심사든 엄청나게 긴장했습니다. 너무 긴장해서 면접에서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요. 잘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 짜내서 필사적으로 대답했어요. 그랬다는 건 잘 기억하고 있어요(웃음). 2차 심사 때는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하고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는데, 해보니까 의외로 ‘할 수 있을지도!’라고 생각했어요. ‘여기가 노력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라고 느끼면 저한테 시동을 거는 그런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웃음). 스스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주변에서는 ‘배짱이 있네’라고 들을 때가 꽤 있어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심사에서 계속 붙어서 ‘어디까지 갈 수 있으려나?’라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던 중, 멋지게 합격!!

 

최종 심사는 합격자는 번호가 불리면 스테이지에 올라가는데,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은 보통 긴장되는 게 아니었어요. 거기까지 도착하면 역시 합격하고 싶은 마음도 강해지잖아요. 제 엔트리 넘버는 16번이었는데 ‘16번’이라고 불리던 순간에는 너무 놀라서 온몸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스테이지에 올라갔더니 세계가 바뀐 것처럼 느껴졌고 ‘멤버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해나갈 수 있을까?’라는 마음도 있었고, 불안도 즐거움도 두근거림도 여러 가지 기분이 한 번에 몰려왔습니다. 합격을 가족들에게 알렸더니 모두 기뻐해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했던 게 오빠였어요. 굉장히 텐션이 올라있었습니다(웃음).

 

 

연수생부터 시작해서 ‘케야키자카46’로

앞만 보고, 계속 달렸습니다

 

처음엔 연수생부터 시작했네요.

 

맞아요. 저 나름대로 여러 복잡한 마음도 안고 있어서,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하고 진심으로 생각했어요. 먼저 멤버가 된 동기들을 조금이라도 따라잡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레슨을 받았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레슨을 받느라 매일이 빡빡한 일정. 보육교사의 실습과 연수생 라이브의 안무를 외워야 하는 게 겹쳐서 벅차고 힘들었어요. 그래도 함께 레슨을 받던 모두가 정말 긍정적이고 열심히 해서 ‘동료가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열심히 할 수 있는 힘이 솟구쳤어요. 처음으로 팬분들 앞에 섰던 건 잊을 수 없는 연수생 라이브. 스테이지 위에서 조명을 받고 그런 저희를 팬분들이 사이리움을 들고 응원해 주시던 풍경이 반짝반짝거려서요. 그때 ‘나, 아이돌이 됐구나’라고 진짜로 실감이 났어요.

 

희망했던 케야키자카46에 가입하는 것이 결정되고, 본격적으로 아이돌로서의 활동이 스타트. 그때부터는 어땠나요?

 

스트리밍으로 개최됐던 케야키자카46의 라스트라이브가 멤버로서 배정되고 첫 라이브였어요. 그룹이 다시 태어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하는 불안감도 있었고 오디션을 보기 전부터 정말 좋아했던 그룹이 끝나버린다는 것에 대한 서운함도 컸습니다. 하지만 선배님들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그건 헤아릴 수도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배인 저희가 끙끙 앓을 수도 없을 것 같았어요. 억지로라도 기분을 바꾸려고 노력해서 ‘사쿠라자카46’라는 새로운 그룹으로 노력해 나가겠다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때부터는 아무튼 변화가 너무 빨라서 필사적이었어요. 그런 국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룹 활동은 항상 정말 즐거웠습니다.

 

멤버 모두 친하고요.

 

맞아요. 그리고 그건 선배님들이 모두 정말 상냥하셔서 저희 후배들이 편하게 있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셔서 그런 것 같아요. 선배님들한테는 항상 감사한 마음이에요. 막 들어갔을 때는 동경하는 선배뿐이어서 긴장해서 눈을 보고 얘기도 못하고, 한마디 나누는 것도 정신이 없었는데요, 요즘엔 조금씩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좋아하는 (와타나베) 리사 씨와도 많이 같이 지내게 돼서 감동. 엄청 장난치면서 같이 까불어주는 리사 씨는 저에게는 친언니 같은 존재예요. 졸업하셔서 정말 아쉽지만 리사 씨의 앞으로의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적으로도 친한 멤버는?

 

오오누마 아키호와 동갑이고 연수생 때부터 함께였기도 해서, 밥을 같이 먹거나 카페에 가거나 해요.

 

그룹 활동을 계속하는 중에 우울해진 적도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사쿠라자카46이 되고 처음으로 MV에 참여했던 게 “Buddies”였는데 그게 첫 MV 촬영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던 중에 ‘적은 인원으로 자유롭게 춤춰주세요’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실제로는 곡의 해당하는 파트를 부르면서 춤을 춰야 했었는데 ‘자유롭게 춤추라니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어떡하지?’하고 작게 패닉이 왔어요. 춤추는 건 빙글빙글 돌거나 하면서 어떻게든 했는데 촬영이 끝나고 나서 춤에 정신이 팔려서 노래를 전혀 못 불렀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파트는 절대 MV에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나, 뭘 한 거지…?’하고 크게 패닉. 주변의 멤버가 당연한 듯이 하는 걸 못 했다는 게 한심하고 분해서, 영문을 모를 정도로 눈물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날은 그 장면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계속 울고 있었는데, 다음날에도 촬영이 계속됐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너무 많이 울었던 바람에 눈이 퉁퉁 부어버렸어요. 제 프로의식의 부재에 우울해져서…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제 모습이 너무 티가 나서 모두에게 들켜버렸어요. (사이토) 후유카 씨 같은 선배나 매니저분들이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하고 격려해 주셨어요. 위로해 주시는 자상함에 또 울어버렸어요. 아무튼 계속 울고 있었네요. 그리고 2nd 싱글 ‘BAN’의 MV 촬영의 안무를 배울 때도 슬럼프에 빠져있었어요.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간주 부분의 춤이 몸에 익지를 않았어요. 혼자 출 때는 되는데 다 같이 추면 안 돼서.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타이틀곡 선발 멤버가 되어서 부담감이 커서 제가 의식하는 것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나 더. 3rd 싱글의 ‘PERIMETRON’의 팀 촬영을 했을 때, 표정 짓는 게 정말 어려워서 뻣뻣해져 버렸는데 촬영이 끝나고 OSRIN 씨가 저를 불렀어요. ‘너는 좀 더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지금 이대로는 아까워’라고 말해주셨어요. 그 촬영 중에 계속 ‘나, 못 하고 있구나…’라고 막연하게 느꼈던 것도 있어서, 한심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야기가 끝난 직후에 화장실로 달려가서 혼자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많은 눈물을 흘렸네요(눈물)

 

저, 평소에는 그렇게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닌데요. 이렇게 돌아보면 엄청 울었네요(웃음). 그것도 분해서 운 것밖에 없네요. 그래도 그건 향상심의 반증이기도 한 것 같아요. 분하다거나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경험을 거쳐서, 잘 못했다고 너무 우울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어요. 지금은 끝까지 반성하고 나면 그 후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멋져요! 레나 씨가 일 중에서 좋아하는 건 어떤 건가요?

 

어떤 일도 진심으로 즐거운데요, 팬분들과 함께하는 라이브가 역시 정말 좋아요. 라이브 시작 전에 멤버 모두 원진을 만드는 순간에 우선 엄청나게 기합이 들어가고, 처음 Overture가 흐를 때 스스로 마음을 북돋아 줘요. 그 순간은 두근두근하지만, 그건 좋은 긴장감이에요. 코로나 때 라이브가 없던 시기엔 계속 ‘라이브 하고 싶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라이브가 다시 가능하게 되어서 지금은 팬분들이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 대신 스틱 벌룬으로 소리를 많이 내주시는 게 정말 기뻐서, 텐션이 올랐어요. 라이브의 준비는 힘든 부분도 많지만 스테이지 위에 올라가서 팬분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전부 날아가 버릴 정도로, 엄청나게 즐거워요! 그러고 보니, 한 번이지만 라이브 때 객석에 있는 오빠를 발견해버린 적이 있어요. 꽤 앞쪽 자리에 앉아있어서 엄청 어색했어요(웃음).

 

전국 투어에도 나오셨어요!

 

첫 전국 투어는 모두 서로를 격려하면서 열심히 했던 라이브였다고 생각해요. 안무가 TAKAHIRO 선생님이나 연출가분들이 매회 공연이 끝난 직후에 조언을 해주시고 반성할 점을 개선해나가면서 스테이지를 업그레이드 해나갔습니다. 투어라고 하면, 그 지역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추억이거든요. 후쿠오카에서 먹었던 ‘신신’ 라멘이 너무 맛있어서 리필했어요(웃음). ‘좀 있다가 라이브에서 많이 움직이니까 괜찮아’라고 저한테 좀 물러졌었어요. 어디서 먹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도미챠즈케도 일품이었습니다.

 

백스 라이브도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스테이지에 서보니 어땠나요?

 

‘사쿠라 에이트 이외의 멤버도 이렇게 한 명 한 명 빛나요!’라고 어필할 수 있는 곳으로서 마음껏 퍼포먼스 할 수 있어서, 최고로 즐거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쭉 마이페이스

생각을 하는 만큼 우유부단해졌을지도

 

조금 전에 오빠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가족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가족 구성원에 대해 알려주세요.

 

부모님과 2살 위의 오빠까지 네 명입니다. 어머니는 상담을 많이 해주시고 제가 고민할 때는 자기 일처럼 같이 생각해 주세요. 성인이 되고 나서는 친구 같은 존재면서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사나 매너, 예의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엄격했어요. 윗분을 대하는 태도, 감사의 인사를 귀담아듣는 것, 집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가지런히 두는 것 등은 어머니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몇 번이나 들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런 저희의 대화를 지켜봐 주셨어요. 아버지는 재미있는 분이에요. 그렇지만 우스운 사람은 아니에요… 뭐랄까… 비교적으로 저를 응석받이로 만들어주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어요. 오빠는 2살 위이고 지금도 사이가 좋아요. 굉장히 말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으로 야구를 정말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는 항상 오빠 뒤에 붙어서 놀았어요. 오빠가 친구와 하는 전쟁놀이에 끼워달라고 하거나, 남자애 같은 놀이를 할 때가 많았으려나요. 그래도 오빠는 온화한 성격으로 ‘와~’하고 싸움을 걸어오는 타입은 아니었어서, 부드러운 전쟁 놀이였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알려주신 태어났을 때의 에피소드를 알려주세요.

 

새벽 5시쯤 태어났던 것 같아요. 예정일보다 20일 정도 일찍 태어나서 2340g 정도로 작았던 것 같은데, 굉장히 건강했다고 합니다.

 

“레나”라는 이름의 이유는?

 

어머니가 “레”라는 글자를 마음에 들어 해서 이 한자를 넣고 싶었던 게 원래 계기였던 것 같아요. “나”는 분명 울림이 좋아서 합친 거 아닐까요. 아름답고, 마음도 아름답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풍요로운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가족이나 친구들은 “레나”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학원은 어떤 걸 다녔나요?

 

유치원 때는 그림 교실에 다녔어요. 하지만 그건 물감으로 즐겁게 좋아하는 걸 그리는 놀이 느낌이었을까요. 그리고 발레와 피아노도 배웠는데 발레는 정말 싫어했어요(웃음). 오빠가 다니던 수영장 옆에 마침 발레교실이 있었던 것 같아요. 3살 정도의 저는 별로 흥미가 있었던 게 없던 같은데 부모님도 뭔가 배우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래서 ‘발레, 배워볼래?’하고 말씀하셔서 초등학교 1학년쯤까지는 발레교실에 다녔는데, 레슨에 가서 울고, 발표회도 싫어서 울고, 어쨌든 계속 울었어요.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잘 못해서 무대에 오르기 몇 분 전에 ‘올라가기 싫어’라고 크게 울었습니다. 모처럼 받은 화장도 전부 지워져버려서요. 부모님도 ‘그렇게 싫으면 그만둘까?’라고 생각하셔서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도 스스로도 당시에 뭐가 그렇게 싫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레오타드도 귀여웠고 선생님도 착하셨고 싫어할 부분이 없었을 텐데, 당시의 저는 뭐가 그렇게 싫었냐고 물어보고 싶어요(웃음). 피아노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 정도까지 배웠어요. 피아노는 싫어하진 않았는데요. 저, 연습을 거의 안 해서 거의 안 늘었어요. 당연한 거지만 좀처럼 잘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만뒀습니다.

 

어렸을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변한 부분이나 변하지 않은 부분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흠… 변한 부분은 조금씩이지만 낯가림이 나아지고 있는 걸까요. 옛날에는 꽤 심했는데 이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좋아져서 처음 보는 분들을 대할 때도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자’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우유부단해졌어요. 옛날에는 뭐든 딱 정했는데, 왜 그럴까요(웃음). 아마 이런저런 걸 알게 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게 늘어나서일까요? 그래도 사카미치 합동 오디션에 지원하자고 결심했을 때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어요. 나이 때문도 있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라고 정했으니까 그때는 확 긍정적인 마인드였어요.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정할 때는 전혀 우유부단하지 않은데요. 대체로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실패하기 쉬우니까요. 그래서 거기선 별로 모험을 안 하고 항상 먹는 걸 시킬 때가 많아요. 반대로 마이페이스인 부분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어요. 마이페이스라는 건 주변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선 좋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룹 활동을 하는 중에는, 메이크업 순서가 늦은 편이면 대기실을 나오는 게 가장 마지막이 되어 버리는 경우는 자주 있어요. 뭘 해도 늦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서두른다고 생각하는데도, 금방 늦어져서. 예를 들어 ‘오늘은 몇 분에 출발하는 차를 타자’고 스스로 정했는데, 두 대 지난 뒤의 전차를 타게 되어버렸다, 같은 일은 자주 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은 청춘을 엔조이!

공부만은 좀 서툴렀습니다

 

학창 시절의 추억을 알려주세요

 

사실 저는 초등학교 때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어서요. 그래서 중학생이 되었을 때 새로운 환경에 뛰어들어서 변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중학교 수험을 보기로 결심.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수험 공부를 시작했어요. 목표로 하고 있던 중, 고등학교 일관 여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6년간은, 계속 부활동을 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의 저는 그다지 어떤 것에 열중하는 게 없었는데, 부활동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가능하면 운동부가 좋겠다고 생각해서 오리엔테이션을 돌면서 치어같이 의상이나 도구가 귀여운 배턴 트월링부에 끌렸어요. 항례의 해외연수를 갈 수 있다는 특전도 중학교 1학년인 저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입부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힘든 부활동이었어요. 학교를 가는 평일은 물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도, 매일 부활동. 강호 학교는 아니었지만 전국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고, 문화제에서 발표하는 무대도 있고 해서, 가는 날이나 가지 않는 날이나 어쨌든 연습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줄곧 동경하고 있던 댄스부로 옮겼어요. 댄스부는 고등학생이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들어갈 수 있는 날을 기대하고 있었어요. K-POP의 좋아하는 곡에 맞춰 춤추거나, 컨템포러리나 재즈댄스 같은 공연에도 도전하고, 다 같이 와글와글하면서 굉장히 즐거웠어요. 춤추는 건 왠지 좋아했어요. 배턴트월링부는 선후배 상하관계가 엄격했는데 댄스부는 전혀 달랐어요. 후배한테 불려갈 때도 있었는데 ‘뭐 어때’라는 생각이었어요(웃음).

 

청춘을 만끽하셨네요.

 

네. 부활동도 열심히 했고, 인간관계도 좋았어요.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절친이 되었는데요.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는데도 계속 함께였어요. 그 아이가 언니 같은 캐릭터고 제가 동생 같은 캐릭터여서 굉장히 의지하고 있었고, 과제 때문에 곤란할 때나 부활동에 아이디어를 내야 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라든지, 여러 가지 일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참고로 그 관계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자주 바보 캐릭터라고 놀림받고 있는데, 학교 성적은 어땠나요?

 

공부는 계속 못했고, 교과서를 펴면 바로 잠이 오거든요. 예법 빼고는 거의 다 못했어요. 특히 수학이랑 영어는 엄청나게 못해서, 국어나 사회 같은 문과 과목이 조금은 점수가 나았던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필요한 “존재”이기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점점 더 빛나고 있는 레나 씨! 앞으로 사쿠라자카46 중에선 어떤 존재가 되고 싶나요?

 

제가 그룹에 들어가는 게 결정된 첫 쇼룸에서 “존재”라는 말을 색지에 썼었거든요. 그룹에 있어서 필요한 존재이고 싶다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제 안에 있어요. 거기에 더해서 지금은 아름다움을 갖춘 존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저한테 의외로 욕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새로운 발견이었고요. 그때까지는 그다지 자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레슨을 거듭할수록 점점 ‘좀 더 이렇게 하고 싶다’라든지 ‘좀 더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라이브가 끝난 후에 ‘다음엔 저 파트를 이렇게 해보자’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저 이런 일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많아졌어요. 멤버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모델이나 연기 일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모르는 분들에게도 저를 보면 즐겁거나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TBS 방송 “라빗또!”의 레귤러를 경험한 것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처음에 “라빗또!”의 목요일 레귤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쁜 것보다도 ‘나로 괜찮은 걸까…?’하는 기분이 더 컸어요. “거기 돌면, 사쿠라자카”이외의 방송에는 거의 출연한 적이 없는 내가 생방송이라니, 겁이 많아지고 불안했어요.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기린의 카와시마씨나 야다 아키코 씨를 시작으로, 주변 출연자분들이 매회 도와주셔서요. 제가 어떤 발언을 해도 그걸 받아쳐서 재밌게 해주셔서, 온에어 때마다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어요. 로케나 음식 레포트에서는 함께 출연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받이 받았고 매번 많이 배웠어요. 고정 출연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말을 걸어주시거나 하는 기회가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아이돌을 목표로 하고 싶은지 알려주세요.

 

아이돌이 된 순간부터 계속 사랑받는 사람으로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 존재가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면 무엇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하고. 이상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항상 겸손하고, 자신에게 엄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해서 항상 성장해갈 수 있는 저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적인 꿈은 있나요?

 

흠… 뭘까요. 언젠가 가능하다면 결혼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만, 지금은 일이 너무 즐거워서, 아직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요(웃음).

 

그런 레나 씨의 좌우명은?!

 

하지도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하고 후회하자. 하지도 않고 후회하는 인생은 아깝다고 생각해요. 하지 않을 바에는,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지 않나요? 이건, 사카미치 합동 오디션을 본 것을 계기로 생각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이 사진집을 구매해 주신 분께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항상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사진집을 열고 싶어지고, 다 읽었을 때는 행복한 기분이 퍼지는 따뜻한 한 권을 목표로 촬영에 도전했습니다. 이 마음이 여러분에게 닿기를. 그리고 이 사진집이 당신에게 계속 곁에 두고 싶은 책이 되기를. 사랑을 담아♡

 

 

 


레나님은 사쿠라자카에 꼭 필요한 존재예요..❣

앞으로도 원하는 일 많이 하면서 즐겁게 활동할 수 있기를😳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타무라 호노 2nd 사진집 <隣の席になりたい> (옆자리에 앉고 싶어)

 

HONO TAMURA LONG INTERVIEW

 

언젠가 끝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필사적이 된다

 

 

깊게 호흡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미국) 산타페의 붉은 암벽 앞에 진홍색 드레스를 입고 섰을 때의 일이다. 약관 25세의 자신이, 태곳적부터 이어진 이 풍경과 고요히 어우러져,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신기한 감각. ‘나는 뭐든 될 수 있다’, ‘아직 어디든 갈 수 있다’ -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는 쉬는 시간마다 복도나 계단에서 친구들과 함께 아이돌 춤을 따라 했다. 방과 후에는 배구부 연습으로 기진맥진하면서도 돌아가는 길에는 친구들과 장난치며 포복절도하던 나날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아침 연습도 생기고, 아침 6시부터 전철을 타고 등교하고 부활동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 그렇게 바쁜 와중에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이 “아이돌”의 존재였다. ‘이걸 극복하면, 좋아하는 아이돌과 만날 수 있다’ 그 마음이 ‘지금’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

대학교에서 보육사가 되기 위한 공부와 배구를 양립하고 있던 그녀에게 바뀌는 계기가 찾아온 것은 2018년이다. ‘멤버와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사카미치 합동 오디션 세미나에 참가했고 그 후 오디션에 참여하게 된 것. 노래도 댄스도 자기 PR도 자신감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좋아하는 그룹에 대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 해 겨울, 그녀는 20세에 (당시) 케야키자카46의 멤버가 되었다.

 

‘고등학교 부활동은 지금도 자주 꿈에 나와요. “충실하게 보낸 청춘의 날들이었어요”라고 미화하고 있지만, 아마 제가 느끼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던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그도 그럴 게, 아이돌 생활 중에 그때를 넘을 정도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 후후후 (웃음) 저에게 있어 부활동은 “그 나날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뭐든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할 정도의 경험이었네요. 그래도 그것도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할 수 있던 거예요. 그 힘든 연습을 평생 계속할 수는 없죠(웃음). 아이돌로서의 활동도 아마 똑같다고 생각해요. 멤버와 함께 있는 것도 팬분들과의 교류도 전부 즐겁지만 그것도 언젠가 끝이 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필사적이 돼요. 6년 전, 아이돌이 되었을 때부터 저는 “끝까지 해냈다"라고 생각될 때까지, 최후의 최후까지 열심히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언젠가 졸업할 때, 절대 후회하고 싶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끝”이 있다는 게 제가 아이돌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 하는 방식에는 기분 좋은 리듬과 부드러운 멜로디가 있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확실히 ‘가수’의 소리인데, 말하는 내용은 운동선수 느낌. 게다가 그 모습은 성모 같은 자애의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아마 아이돌이 되고 6년에 걸쳐 획득한 밸런스일 것이다. 6년 전에는 아이돌로서의 ‘예술점’을 몸에 익히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고.

 

‘부활동을 했던 덕분에 어떤 힘든 스케줄이 있어도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제 스킬의 부족함이 그룹으로서의 평가에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혀오는 느낌이었어요. 스포츠의 경우에는 승패가 있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게 나눠져 있습니다. 그런데 노래나 춤은 제가 “이렇게”라고 믿고 해왔던 것도 어떻게 보일지는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노래와 춤에 대해서는 항상 필사적이었어요. 그것과 동시에 특히 그룹으로 활동할 때는 저의 한심한 점이 그룹 전체에 영향을 준다거나 팬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자신감이 생기지 않아서, 소극적이 되는 부분도 있었어요. 언제나 마음속에선 “불안하네”라고 느끼고 있었고 중요한 파트를 맡았을 때도 솔직히 기뻐할 수 없어서… 항상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걸로 괜찮은 걸까?” 하고 헤맸어요. 저 스스로도 “귀찮은 애네”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이 없었어요(쓴웃음). 주변에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 했던 것 같아요.

동경하던 그룹에 들어와서, 2기생이라는 존재를 팬분들이 쉽게 받아들여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했고, 좋아하는 그룹에 2기생이 들어온 것으로 흠이 가게 하지 않으려는 의미에서 필사적이었어요. 좋아하는 만큼, 저에게 부담을 많이 줬던 것 같아요.’

 

 

마음의 부정적인 부분을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소극적인 마음을 더욱 몰아붙였던 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철저하고 엄격한 성격.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칭찬을 들어도 그것이 자신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는 한, 쉽게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변의 스탭이나 멤버, 팬들에게 칭찬을 듣고 “그렇게 봐주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기뻤지만, 좀처럼 자신감으로는 이어지지 않아서… 그 부분은 저의 특히 귀찮은 부분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 스스로 “해냈다!” “최선을 다했다!”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자신감이 생기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만큼, 누군가 저를 깎아내려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달까…(웃음).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되는 말을 들어도 제가 "좋다"라고 생각했다면 마음이 아프지 않아요. 저만의 중심이 있고, 그건 흔들리지 않습니다.’

 

목소리의 톤은 밝지만, 이 이야기를 할 때의 그녀는 어딘가 괴로워 보이는 인상을 줬다. 그중에서도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된 것이 첫 번째 사진집 “첫걸음”이다.

 

‘사진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 스스로 “온 힘을 다했다”고 생각한 게 몇 가지 있었어요. 그중 하나가 몸 만들기였습니다. 영양학에 기초한 단식과 레코딩 다이어트를 철저히 해서, 노력하는 것에 따라 제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집을 만드는 준비 기간에, 제가 한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제 의견을 엄청나게 전달했어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면 “저는 이런 쪽이… 좋다고… 할까요~” 같은 느낌으로(웃음). “절대로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제 의견은 이래요”라는 것을 제대로 전할 수 있던 건, 제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때까지는 안무를 배울 때나 라이브의 리허설에서 눈치챈 것이 있어도, 2기생이라는 것도 있어서 좀처럼 말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사진집을 계기로 제멋대로는 아니더라도 고집하는 부분을 내보이는 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룹에서도, 제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을 위해서라도 납득한 것을 전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 의견을 제대로 전하는 것도 중요하구나, 하고.’

 

학생 때, 어머니와 싸울 때마다 들은 말이 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줘’ 옛날부터 내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솟아오르면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건 아이돌이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변하지 않았다.

 

‘학생 때는 엄마가 배구에 대한 의견을 낼 때가 많아서, 그럴 때마다 저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 의견이 정곡을 찌르는 의견이었기 때문에 저는 “알겠다니까!”라고 말했을 뿐, 그 외에는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안에 소용돌이치는 부정적인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어찌 됐든 서툴러서, 부모님 외에는 아무하고도 싸운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생각하고 있는 걸 전부 말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드는 게 좋아”라고 말씀하셨지만, 애초에 제 안의 부정적인 부분을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긍정적인 것이나 즐거운 것이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금 당신한테 이런 이유로 화났어요!” 같은 걸 전한다고 해도, 부정적인 감정이 퍼진다는 것만으로 문제 해결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다면 즐거운 대화를 하는 편이 낫다고. 그룹 활동 중에도 위화감을 느꼈다고 전하는 걸로 제 찝찝한 원인을 없앤다기보다는 멤버와 즐거운 이야기를 해서 그 찝찝함을 잊어버리는 게 낫다고. 애초에 사쿠라자카의 멤버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저의 이상함을 알아차려주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위화감 같은 걸 느낄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된 것 같아요.’

 

14년간 계속해왔던 배구가 영향을 주었을까, 멘탈적인 부분에서는 쿨한 면도 있고, 어떤 하나의 감정에 빠져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녀가 중학생이었을 때, 시 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갔을 때 현관에서 어머니가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해’하고 포옹을 해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기뻐 보이는 어머니를 흘긋 쳐다보고 포옹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그렇게 잘 기억나진 않는데, 제가 “됐다니까!”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엄마는 그게 정말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쓴웃음). “그때의 호노는”이라든가 지금도 얘기하세요. 그래도, 제 성격적으로는 “해냈어~!”라든가 천진난만하게 껴안는 타입은 아니고, 벌써 다음을 보고 있다고 할까…’

 

 

새로운 만남에 두근두근. 사람은 변하는구나~하고

 

퍼스트 사진집으로부터 3년이 지나, 이번 사진집이 탄생했다. 3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정말 많이 변했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무엇을 계기로 바뀌었나 하는 그 “무엇”은 딱 떠오르지 않아서’라고 말하면서, 또 기분 좋은 멜로디에 말을 싣는다.

 

‘멤버를 시작으로 주변 스탭분들, 팬분들이 저를 천천히 바꿔주신 걸까요… 3년 전에는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어쨌든 “지금”에 필사적이어서,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돌”로서의 활동 이외에는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무대에 서는 것이 전부였거든요. 지금은 그것이, 지금을 마주하면서도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버라이어티, 잡지, 연기, 사진집 일도 포함해서, 마음속에 “아이돌” 이외의 것도 넣을 수 있는 여백이 생긴 것 같아서, 알찬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에는 새로운 환경이 어렵게 느껴져서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잘 하지 못했는데요, 저만의 세계 속에 틀어박혀있는 편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여백이 생겨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즐겁고 새로운 것과 만날 때 두근두근할 수 있게 되어서, 사람은 변하는구나 하고(웃음). 저에게 자신이 없었을 때는, “다들 대단하네~”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아래를 향하고 있었으니까요.

사진집도, 첫 번째 사진집 때는 처음 혼자서 하는 일이라는 걸 너무 깊게 생각해서, 몸 만드는 것도 한계까지, 죽을 기세로 했어요(웃음). 그래서 그때의 저 다운 표정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촬영이 다가오면서 이 3년간에 제 안에서 생겼던 여백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아무 목표 없이 나아가는 것이 스트레스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편이 마음이 편해서, 열심히 하는 걸 그만두거나 멈추는 게 무서운 성격이라서요… 그게 이번에 한해서는 “쉴 수 있을 때는 쉬자!”고 생각을 바꾸고 “덜어내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끝까지 저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뭐 어때" 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이 3년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변화라는 건 원래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천천히, 서서히 변하는 거라고. 체형관리도, 이 3년간 계속 해왔으니까 “뭐 어때” 하고 생각할 수 있는 타이밍이 있었어요. 혹시 첫 사진집 단계에서 “뭐 어때”의 경지에 올랐다면, 저는 심하게 후회하지 않았을까요(웃음).

결과적으로, 이번 사진집은 즐거우면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멍하게 있을 때는 그냥 렌즈를 계속 쳐다보고 있거나 하는 너무 내추럴할 정도의 제가 있었어요. 퍼스트 사진집 때는 “이렇게 보이고 싶다”는 소망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바로 그대로, 제 모습 그대로 찍혔어요.’

 

3년간의 변화 중에, 제대로 자기 생각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후배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크다. 선배가 많았을 때는 그냥 따라가는 것에만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한 분 한 분씩 졸업을 하고, 저희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생겨서 그룹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해갔어요. 무엇보다 팬들을 섭섭하게 할 수는 없었고, 저희들도 외로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요. 전부 우리한테 달려있다는 걸 깨달았고, 센터에도 섰기 때문에 우리들이 우물쭈물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말하지 못할 거라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고, 그것이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모두가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게 멋지구나, 하고. 존경하는 선배가 졸업하는 것은 슬프고 쓸쓸하지만 확실히 얻는 것도 있었어요. 선후배의 관계가 생긴 것은 그룹에게도 저에게도 크게 성장으로 이어지는 사건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배들의 졸업 외에도, 케야키자카46에서 사쿠라자카46으로 개명하면서 생긴 자각도 있다.

 

‘케야키자카에서는 2기생이었지만, 사쿠라자카로서는 1기생. 설마 그룹의 결성에 관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동경하던 그룹에 들어간 것에 감사함도 컸지만, 부담도 커서 위축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새로운 그룹을 만들게 되어서, “어렵네”라고 느끼면서도 그룹의 이미지도 음악도, 의상도 전부 “지금, 여기”서 만들어지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보이는 게 맞을지도 모른 채로, 저희가 믿었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어요. 어쨌든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에게는 즐거웠어요. 지금은 밝고 긍정적이고, 엄격한 상하관계도 없고, 전원이 동료라는 감각이 사쿠라자카스럽다고 느끼고 있어요. 멤버뿐만 아니라 스탭분들도 포함해서 거리감이 없고, 함께 만들어가는 동료라는 느낌이 정말 기분 좋아요.’

 

 

멤버의 대단함이 좀 더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는

 

이 사진집이 발매되기 전날, 그녀는 26살이 된다. 아이돌이 되고 아직 6년이지만, ‘졸업’이라는 두 글자를 의식하고 있는 걸까.

 

‘아이돌 활동 기간은 유한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반짝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돌로서 활동하는 이상, 각자 ‘졸업’의 타이밍에 대해 생각하는 게 있을 것 같지만, 저는 사쿠라자카46으로서 아직 하고 싶은 게 더 있어요. 특히 페스티벌에 많이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데요, 팬분들만 즐길 수 있는 그룹이 아니라 처음 보시는 분들도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되고 싶어요. 그건 저희의 과제이기도 해요. 케야키자카 시대부터 페스티벌에는 여러 번 나갔었는데, 작년부터 해외에도 나가게 되었고, 사쿠라자카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그룹들도 더욱 해외에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J-POP이라는 거 좋구나”라거나 “사쿠라자카 이렇게 분위기 띄울 수 있구나”라고 알아주시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희들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음악이 좀 더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왜 그런 큰 꿈을 품게 되었냐고 하면, 그건 제가 사쿠라자카 모두를,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수줍은 웃음). 나중에 라이브 영상을 다시 보면서, “다들 어떻게 이렇게 멋있는 거야!! 이 순간의 이 멤버, 다들 제대로 봤을까?”라고 생각하거나 해요. 역시 저 자신에 대해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쓴웃음). 저는 정말 진심으로 모두를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멤버의 대단함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고,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고 싶어요!’

 

매우 강한 마음이 매우 강한 목소리를 타고 흐른다. 사쿠라자카에 대한 최상급의 애정이 말속에서 흘러넘친다.

 

‘게다가 저는 사쿠라자카의 곡을 좋아해요. 음악이라는 게, 노래를 부르면서 처음 생겨나는 감정이 있어요. 혼자서는 모르지만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는 눈앞의 광경과 그 순간의 기분이 연결되어서, “이 가사의 의미는 이런 거였구나” 하고, 그때까지 와닿지 않았던 구절이 마음에 와닿기도 해요. 매번 “이게 라이브구나” “이게 날 것의 리얼한 감정이구나” 하고 살아있다는 실감이 납니다. 그날 모여주신 분들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고, 몇십 번째일지도 모르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한순간이라도 같은 감정이 되면서 “이게 있어서 힘낼 수 있어”라고 생각해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대 위의 순간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돼요.

아이돌이 된 것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 굉장히 큰 변화였지만, 아이돌이 되고 나서 변화한 것도 많아요. 예를 들어 2년 전에는 채워지지 않았던 도쿄돔이, 지난번 공연에서는 360도로 관객분들의 미소를 볼 수 있었어요. 라이브를 하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시고 있구나” 하고 팬분들의 사랑의 힘을 엄청 느끼고, 멤버들과도 자주 “Buddies 최고!”라고 말하고, 아직도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라이브에서는 한계까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아이돌로 있고 싶어요. 저희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걸 보고 있는 분들에게도 “살아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게, 저희 라이브의 의의라고 생각해요.’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기대돼!’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하면서, 인생의 다음 목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제일 즐거웠네~” 라고 생각하는 게 중학교 때예요. 부활동도 열심히 했고 엄청 힘들기도 했지만, 돌아가는 길에 친구와 구를 정도로 웃거나(웃음). 그런 별거 아닌 매일이 정말 즐거웠어요. 20대는 노력이 필요했지만, 자연스러운 제 모습 그대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게 혹시 30대는 아닐까 싶고, 아직 뭐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무적!”이라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순수하게 무적의 30대를 목표해나가고 싶어요(웃음)’

 


 

호노짱이 사쿠라자카를 좋아하는 만큼 우리도 호노짱을 좋아해!

호노짱이 원하는 만큼 행복하게 아이돌 생활 즐겨주기를 바라며..🙏

BRODY 2019년 4월호 모리야 아카네 (사진, 인터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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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존재의의라고 할 수 있는 이 무기는

케야키자카46을 언젠가 정점으로 이끌어주는 걸까


모리야 아카네


힘껏 춤춰라


이 무대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춤추는 것이,

케야키자카46가 케야키자카46로 있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모리야 아카네는 믿고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들을 지탱하고,

그 아이가 보여주는 것이 양식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케야키의 댄스는 체력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을 빼지도 않고

'가볍게 해도 괜찮아요'라고 들어도 '가볍게' 할 수 없어요



춤추지 않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싶었다



- 케야키자카46는 데뷔곡 "사일런트 마조리티"부터 최신곡 "검은 양"에 이르기까지, 댄스가 인상적인 그룹이에요. 지금까지도 댄스가 주력인 아이돌 그룹은 많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댄스를 주축으로 하는 아티스트도 있습니다. 하지만 케야키자카46는 그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 지금까지 없었던 타입의 그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안무 선생님 TAKAHIRO 씨의 공도 크다고 생각하는데 모리야 씨는 퍼포먼스를 어떤 마음으로 마주보고 계시나요?


모리야 굉장한 춤이라고 해야할까, 춤추면서 즐거워요.



- 기술적으로는 점점 어려운 것이 요구되는데요.


모리야 그렇네요. 확실히 TAKAHIRO 선생님도 서서히 난이도가 높은 걸 만들어 주시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려운 안무가 온다는 건 점점 향상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도전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져서, 그건 순수하게 기뻐요. 그래서 매번 '다음엔 어떤 안무가 오는 걸까?'라고 기대되고, 오랜만에 이전의 곡들을 한번 춰보면 완전히 다른 걸로 보이는 것도 있고, 정말 깊고 재밌다고 생각해요.



- 원래 모리야 씨는 케야키자카46에 들어가기 전, 댄스의 경험은?


모리야 없었어요.



- 전에 멤버 중 누군가에게 '누가 가장 댄스에서 성장했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어봤을 때, 모리야 씨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어요.


모리야 와! 그건 기쁘네요. 처음엔 리듬 타는 것도 전혀 못 했는데, 춤을 못 춘다고 생각되는 것도 싫고 분했어요. 그런 이미지를 꼭 불식시키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 거기에 더해서, TAKAHIRO 씨가 매번 다양한 과제를 준비하는데, 모리야 씨는 어떤 모티베이션으로 열심히 하게 되나요?


모리야 TAKAHIRO 선생님이 언제나 굉장한 안무를 만들어주셔서, 그 훌륭한 안무를 표현하는데 저희들이 기술이 없거나,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하면 전하고 싶은 것도 전해지지 않으니까, 그걸 위해서도 열심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매번 하고 있습니다.



- 그 '전하고 싶은 것'은 가사에 담긴 메시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아키모토 야스시 씨가 쓴 가사에 맞게 TAKAHIRO 씨가 안무를 만들고, 그 외에도 여러 스태프가 그 곡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합니다. 그걸 멤버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이미지에 가까워지는지, 혹은 그걸 넘어서 케야키자카46만이 가능한 작품을 만들어 온걸까, 그 대하는 방식도 독특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리야 확실히, 모두 굉장히 마음을 담고 있어요. 그건 느껴져요. '지금까지의 아이돌과는 다르다'고 자주 듣는데, 그 독특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퍼포먼스에도 더욱 힘이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네요.



- 게다가, 팀이라는 느낌이 강해요.


모리야 맞아요.



- 그 이유는 전원 선발이라는 멤버 구성도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거기에 그 주위의 스태프 분들을 포함해서, 전원이 하나가 되어 작품을 대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전해져 옵니다.


모리야 그래서 MV촬영 때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해서, 완성했을 때의 다같이 해냈다는 성취감과 단결감이 대단해요. 그걸 느끼면서 항상 '아, 열심히 하길 잘했다'라고 생각해요.



- 연말연시의 음악방송에서의 '안비바렌토' 센터 릴레이도 확실히 전원이 단결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AKAHIRO 씨가 센터를 맡은 멤버 각자의 곡에 해석에 따른 안무를 매번 만들었는데, 그건 엄청 손이 가잖아요.


모리야 시간이 없는 와중에, 그 멤버의 분위기에 맞춰 여러 패턴의 안무를 만들어 주셔서요. 정말로 TAKAHIRO 선생님이 제일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비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다른 아이돌 그룹은 센터가 바뀌어도 안무가 그렇게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케야키자카46은 그렇게는 안 된다는.


모리야 정말 대단해요(웃음). 그렇지만, 전혀 힘들지는 않고 오히려 그게 케야키자카46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곡과 가사로는 나오지 않는 부분을 채우는 댄스가 있어서 케야키자카46가 존재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



놀람의 눈물과

언젠가 꿈꾸는 상



- 그 중에 '일본 레코드 대상'과 'NHK 홍백가합전'이라는 큰 무대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도전할 때의 마음은 혹시 평소와는 조금 달랐을까?하는 인상도 있었습니다.


모리야 제 개인적인 마음은 특별히 매번 변하지 않아서요. 하나 하나, 전부 중요하니까 거기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지만, 레코대나 홍백은 봐주실 기회가 평소보다 많은 만큼, 안무 보강은 후짱(사이토 후유카) 등을 선두로 평소 이상으로 노력했습니다.



- 사실 사토 시오리 씨나 스즈모토 미유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완전히 똑같은 답이었어요.


모리야 와, 대단해! 똑같았나요?(웃음) 놀랐어요!



- 저도 놀랐습니다(웃음). 어떤 음악방송에서든지 케야키자카46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줄 찬스이기 때문에 긴장을 놓지 않는다. 특히 케야키자카46은 거기서 매번 100 이상을 보여준다. 이 에너지는 어디에서 생기는 건가요?


모리야 너무 전력으로 하니까, 매번 끝난 뒤에는 모두 심하게 숨이 차지만요(웃음). 음악방송은 본방까지 악기 조율이나 카메라 리허설 등 많은 리허설이 있는데, 거기서도 매번 전력으로. 케야키의 댄스는 굉장히 체력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을 빼지도 않고, 항상 그 계산이 어려워요(웃음). 그래서 자주 '가볍게 해도 돼요'라고 듣기도 하지만, 그 '가볍게'가 안 돼요. 케야키의 댄스를 가볍게 추면 확인이 안 되기도 하고요.



- 그렇군요. 특히 레코대는 대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거나, 그런 어렴풋한 기대도 있었나요?


모리야 저희한테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상과는 관계 없이 단순히 퍼포먼스를 열심히 하자고. 다음날 홍백은 다른 곡('유리를 깨라!')이었고, 그 리허설도 있어서 아슬아슬할 때까지 그 연습도 했었고요. 쓸데 없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거기서부터 다음날 TAKAHIRO 씨의 눈물로 이어졌는데요. 'AKB48 SHOW!'(NHK BS프리미엄)에서도 방송되었는데, 홍백 당일에 TAKAHIRO 씨가 레코대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한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처음엔 여러분, 어리둥절했죠.


모리야 '어라, 어떻게 된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우는 것처럼 보여서 '헉'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까지 저희들을 생각해주시다니... 저희들도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고, 정말로 굉장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후짱과 '언젠가 선생님에게 대상 상패를 보여드리고 싶네'라고 얘기했어요.



- 자신들이,라기보다도 주변에서 지탱해주는 스태프 분들을 위해서,라는 거네요. 그 모습을 보고 난 뒤의 홍백은 마음이 조금 다르지 않았나요?


모리야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히라테 (유리나)도 나올 수 없었어서, 히라테를 위해서 춤춘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 그 날의 퍼포먼스는 매우 감정적이고 평소의 라이브에 가깝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모리야 아, 그렇네요. 그럴지도 몰라요. 확실히 라이브에 가까운 느낌이 있었어요.



- 그 상징은 아니지만, 간주에 원을 만들 때 코바야시 유이 씨가 무언가 외쳤죠. 거기에 동조하는 것처럼 멤버나 주위의 댄서 분들도 모두 외치는 장면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리야 그 때, 저는 유이퐁(코바야시)이 외치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것보다도 주위를 감싸고 있던 멤버들의 목소리에 반응해서요. 그래서 '나도 더 해야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게 자연스럽게 일어났다는 게 케야키자카46답네요. 조금 화제에 벗어나지만, 레코대나 홍백에서 같은 무대에 설 수 없었던 히라테 씨에 대해서입니다. 모리야 씨가 본 히라테 씨의 댄스, 퍼포먼스는 어떤가요?


모리야 초기부터 계속 히라테의 등을 볼 때가 많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더 잘하게 되고 싶다든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멋있게 보이는구나 같이 굉장히 배우는 게 많았고, 뒤에서 보지 않으면 모르는 작은 움직임을 포함해서 참고했습니다. 예를 들어 '네가 없어'에서는 이 안무를 할 때의 시선을 이렇게 하면 굉장히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같이. 특히 '불협화음'의 MV 촬영이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같은 씬을 몇 테이크씩 찍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카메라가 돌기 직전까지 안무 확인을 했는데, 히라테만은 이미 곡의 세계관에 집중하고 있달까, 이미 "들어가" 있었어요. 그걸 봤을 때 '아, 이런 건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 그 현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시작되는 거네요.


모리야 맞아요. 저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정말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 그러면 모리야 씨가 봤을 때 3년간 댄스가 성장한 멤버는?


모리야 변했다고 할까, (우에무라) 리나짱과 작년 쯤부터 굉장히 이야기하게 되었는데요. 엄청 영상을 체크하고 있는 멤버예요.



- 그건 본인들의 리허설이나 라이브 영상?


모리야 네. 전체를 보는 멤버고, 댄스도 빼놓지 않고 체크하고, 안무에서도 '여기가 이렇게 됐다'고 바로 알아채는 멤버예요. 그런 부분도 의식이 높다고 생각해요.



- 분명 우에무라 씨는 모두를 따라가고 싶다는, 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거겠죠.


모리야 그렇네요. 그렇게 느꼈습니다.



어떤 포지션에서도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 그리고 케야키자카46는 다른 대인원 아이돌 그룹과 다르게 포지션에 대한 개념도 다르구나 하고. 다른 아이돌 그룹이라면 3열은 눈에 띄지 않고 낙심하는 경우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케야키자카46의 경우에는 일단 댄스가 시작되면 3열이라서 눈에 띄지 않는다거나 하는 게 전혀 없고, 제대로 개개인에게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통의 느낌이라면 '검은 양'에서 스즈모토 씨가 3열이라는 것에 깜짝 놀랄 거라고 생각해요.


모리야 그것이야말로 TAKAHIRO 선생님이 거기까지 제대로 생각해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어디에 있어도 각자 역할이 있고, 곡에 따라 포메이션에 굉장히 이동이 있을 때도 많아서, 그런 의미로 말하면 처음에 어디에 있는지에 관계 없이, 어디에 가도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모리야 씨 개인으로서는 댄스를 어느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예를 들면 케야키자카46을 졸업한 뒤에, 댄스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 한 이렇게까지 요구되는 일은 없겠죠. 지금, 왜 여기까지 노력하신건가요?


모리야 기술적인 것이 무엇으로 연결되는지 물어본다면 모르겠지만, 안무를 외우는 건 기억력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고, 강한 멘탈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표현하는 데 있어서 앞으로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해서, 지금은 여러가지를 흡수할 때, 공부할 때라고 생각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댄스에 한정하지 않고, 더 넓게 표현에 연결하면서. 참고로, 좋아하는 안무는?


모리야 '불협화음' 일까요. 케야키자카46 안에서도 특히 폭발할 수 있는 곡이라서 발산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춤추면서 굉장히 즐거워요.



- 그러면, 이건 어렵다고 생각하는 안무는?


모리야 '바람에 휩쓸려도'의 안무를 외울 때, 처음에 '위험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발의 움직임이 어려워서, '뭐야, 이 스텝은?'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안비바렌토'도 힘들었네요. 이 정도의 동작을 하는건가 싶을 정도의 양이었고, 게다가 템포도 빨랐고요. 역시 점점 난이도가 올라가네요.



- 그렇다고 해도, '사일런트 마조리티'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댄스를 중시하는 그룹으로 성장할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겠죠.


모리야 그렇네요(웃음). 매번 다른 것에 도전하고 있어서 신선하고, 전혀 질리지도 않아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그런 댄스는, 케야키자카46에게 무엇을 남겨주나요?


모리야 음악을 듣고 가사를 읽어서 생기는 이미지를, 댄스로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간달까. 듣고 읽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댄스를 통해서 전해질 수 있고, 곡이나 노래로 나올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기도 하고요. 댄스가 있기 때문에 케야키자카46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BRODY 2019년 4월호 스즈모토 미유, 사토 시오리 (사진, 인터뷰 번역)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토 시오리 X 스즈모토 미유


춤추지 않을 이유는 없다


'춤을 춘다'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에 필요한 경험인가. 반드시 갈고 닦아야 할 스킬인가.

케야키자카46에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멤버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장소에서, 그저 춤을 춘다.

그것이 이 그룹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춤추는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TAKAHIRO식 스텝 업


TAKAHIRO 선생님의 안무는 0에서 3으로 가는 게 아니라 0->1->2->3으로 차례차례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 케야키자카46의 매력 중 하나는, 지금까지 활동해온 아이돌 그룹과는 다른 독창적인 댄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나온 건 데뷔 싱글 '사일런트 마조리티'부터였지만,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케야키자카46의 댄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스즈모토 케야키자카46에 들어오기 전에 저는 E-girls를 좋아해서, 아이돌은 아이돌, 댄스 그룹은 댄스 그룹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했었어요. 저희는 1st 싱글부터 TAKAHIRO 선생님이 안무를 만들어주셨는데, 처음에 노기자카 분들의 여동생으로 들어갔으니까 부드럽고 청초한 안무일까 하고 생각했더니, 전혀 분위기가 달라서 그 때는 '아, 이런 방향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건 스즈모토 씨가 굉장히 하고 싶었던 방향이었나요?


스즈모토 거기에 대해선 특별히 원하는 게 없었어서. 그정도까지 댄스를 하고 싶었는지 말하자면, 별로 엄청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기쁘거나 하는 감정은 특별히 없었어요.



- 오히려 하면서 점점?


스즈모토 그렇네요. 하던 중에, (제가) 역시 춤추는 걸 좋아한다는 걸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사토 씨는 케야키자카46 이전에 계속 클래식 발레를 계속해왔습니다만, 그곳과는 다른 세계네요.


사토 그렇네요. 클래식 발레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부분이 아름답지만, 몸의 상반신을 고정시킨 채로 해요. 너무 (자세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고 들어서 예쁜 기본자세를 유지한 채로 손발을 움직여서 춤을 추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 케야키의 댄스는 반대로 인/아웃 같은, 가슴을 넣었다 내밀었다 하는 것 같은 동작이 기본으로, 그걸 할 수 있게 되면 다른 동작도 멋지게 출 수 있다는 걸 처음에 배워서, 발레와 다른 점에서 '어떡하지?'하고 고전했어요. 어느쪽인지 말하자면 힙합계잖아요. '클래식 발레를 해왔다=춤출 수 있다' 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기 때무에 어려워서 처음에는 불안감이 굉장히 컸어요.



- 신곡이 나올 때마다 TAKAHIRO 씨가 새로운 안무를 만들면서, 점점 레벨이 높은 걸 요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매번 어떻게 마주보고 계신가요?


사토 TAKAHIRO 선생님의 안무는 이전 곡에 나왔던 것이 다음 곡에 살짝 사용되는 게 있어서, 이 한 곡이 가능하면 다음 곡으로 가기 쉽다고 해야하나.


스즈모토 아, 맞아. 플러스로, 라고 할까.


사토 그래서 0부터 3으로 가는 게 아니라 0->1->2->3으로 차례차례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 반복이 있어서 조금의 불안은 있어도 처음 부딪히는 어려운 벽 같은 건 없고, 이 안무를 더 잘 하자는 마음이 돼요.


스즈모토 TAKAHIRO 선생님도 '"사일런트 마조리티"부터 점점 스텝이 올라가고 있으니까, 이건 전에 했던 걸 더 이렇게 한 동작이야'라고, 거기에 대해서 이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확실히 알기 쉽고요.



퍼포먼스 중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 그런 댄스를, 여러분은 어떤 장소에서든지 한판 승부같은 퍼포먼스를 하는군요. 항상 감탄하는 건 음악방송의 퍼포먼스에서 이렇게까지 스토익하게 몰입하는건가 싶을 정도의 기백으로 춤추는 것. 춤추는 데 익숙해진 곡이라면, 말하자면 빼는 법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케야키자카46에게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아서 항상 감동합니다.


스즈모토 확실히 음악방송에서 여러 번 (피로)하면 역시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방송마다 TAKAHIRO 선생님이 '더 이렇게 하자'라고 지적해주세요. 그런 의견을 들으면 항상 긴장감도 생기고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요. 게다가 저희의 퍼포먼스가 TV 프로그램에서 방송될 때 팬이 아닌 분들은 그 한 번밖에 보지 않을 테니까, 아직 케야키자카46을 모르는 분들에게도 거기서 인상을 남기고 싶어요. 그 곡을 퍼포먼스, 댄스, 노래를 포함해서 잘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한 번 한 번을 진지하게 하고 싶어요.




항상 우리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메시지성이 강한 케야키자카46의 곡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과연. 그야말로 그 진면목이었던 것이 연말연시 '안비바렌토'의 센터가 프로그램마다 바뀌고 거기에 맞춰서 안무도 조금씩 변경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타자는 스즈모토 씨였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남아있어요.


스즈모토 전에도 다른 인터뷰에서 '화제가 됐어요'라고 들었는데, 스스로는 잘 몰라서(웃음). 그 때는 히라테 (유리나)가 부상으로 출연할 수 없게 돼서, '안비바렌토'의 프론트 4명이 차례대로 센터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처음으로 하게 됐어요. 솔직히 말하면 얘기를 듣고 나서 본방까지의 시간이 짧아서 안무를 외울 때는 조금 불안해지기도 했지만, 리허설 때 멤버들이 말을 걸어 줬어요. 정말로 쓸데 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연습을 하다가 본방을 맞이했다는 느낌이었어요.



- 스즈모토 씨는 그 곡을 센터에서 퍼포먼스하는 데 있어서, 속으로 무엇을 가장 의식했나요?


스즈모토 뭐랄까...(오래 생각) ...사실은 이런 테마의 인터뷰에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댄스나 퍼포먼스에 있어서 제 자신의 감정을 전혀 모르겠어서요. 춤추고 있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평소 생활하고 있는 감정과 퍼포먼스를 하고 있을 때의 곡의 감정이 같지는 않달까.



- 그건 춤추고 있을 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건가요?


스즈모토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곡의 해석같은 것도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설명도 못 하겠고,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곡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는?


스즈모토 맞아요. 그 정도로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웃음).



- 전에 스즈모토 씨를 인터뷰했을 때, '이렇게 얘기하는 걸 잘 못하니까, 그만큼 댄스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면'이라고 하셨는데요.


스즈모토 맞아요. 정말로 말로 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요. 그래서 오늘은 이런 테마의 인터뷰라고 사전에 들었을 때, '아! 어떡하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쓴웃음).



-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웃음). 사토 씨는 이 센터 릴레이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사토 애니버서리 라이브를 경험하면서 센터가 바뀌는 것에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거기엔 감정이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야말로 센터를 하는 아이가 가장 짊어지고 있는 게 클 테니까, 주위에서는 평소대로 해야 할 일을 해나갈 뿐. 거기에 더해서 TAKAHIRO 선생님이 매번 센터의 분위기마다 안무를 조금씩 바꿔주셔서, 저에게 주어진 변경사항을 마주하고 가는, 작은 일이라도 그걸 제대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보다도 케야키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을


- 그러면, 그 클라이맥스가 된 'NHK 홍백가합전'은 어떠셨나요? 홍백은 일본 음악 씬에서도 명실상부 톱 클래스가 아니면 나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곳을 향한 여러분의 기분은 어떠셨나요?


스즈모토 저는 여러 음악방송들 중에 '이건 잘 하지 않으면 안 돼'라든지 '여기서만은 기합을 넣어서 해야 해'라든지, 그런 기복이 없어서. 특히 홍백은 케야키자카46을 모르시는 많은 분들이 봐주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모르는 분들에게 전한다는 의미에서는 평소의 음악방송과 똑같고, 언제나 그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메시지성이 강한 케야키자카46의 곡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사토 저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라서 특별히 기합을 넣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야말로 어떤 음악방송에서 피로하든지 똑같이 특별해서요. 곡마다 출연할 수 있는 음악방송의 수가 결코 많지 않으니까, 어딘가에서 방심하지 않고, 하나하나가 중요해요.



- 그 대하는 방식은, 어떻게 생겨난 건가요?


사토 역시 처음부터 전원 선발이라는 것도 컸을까요. 졸업한 멤버도 있지만 곡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모두 계속 함께였으니까, 모든 감정을 전원이 맛보는 거잖아요. 모든 과정이나 마음을 공유하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같은 마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AKB48 SHOW!'(NHK BS 프리미엄)에서 방송되었지만, 홍백 당일에는 TAKAHIRO 씨가 레코대(레코드 대상)를 타지 못한 아쉬움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스즈모토 설마 했어요. 그런 모습, 지금까지 본 적이 있으려나?


사토 없었지.


스즈모토 확실히 처음에는 '응!?'하고 놀랐네요. 하지만 그런 TAKAHIRO 선생님의 강한 마음을 느껴서, 저 자신도 모두도 눈물을 흘리고 정말 좋은 팀이구나, 하고 굉장히 기뻤어요. 그리고 제가 여기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것도 있어서 기합이 평소보다 더 들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리를 깨라!'를 피로하는 것도 오랜만이었고요.


사토 지금 생각났는데요, 홍백에서 센터였던 유이퐁(코바야시 유이)을 모두 둘러싸고 춤추고 있을 때, 유이퐁이 처음으로 소리쳤어요. 거기에 모두가 동조해서 '와앗!'하고 외쳤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지금까지의 라이브에서도 감각적으로 '지금 모두와 하나가 되었다'같은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과 같은 걸 느꼈습니다.


스즈모토 MV에서는 처음에 주변 사람들과 히라테가 소리친다고 할까, 서로 말하는 것 같은 설정이었어요. 그것도 있어서 라이브에서도 '유리를 깨라!'에서는 소리칠 때가 많아서, 음악방송이라면 반대로 소리치면 안될까,하고 저를 좀 억누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소리가) 나와버렸습니다.


사토 주위의 댄서분들도 '그 때, 소리를 하나가 돼서 내서 엄청 감동해서, 마음이 동요됐어'라고 말해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저희들의 감정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닿은 건 굉장히 기뻤어요.



- 참고로 각자 좋아하는 안무의 곡을 뽑는다면?


스즈모토 제 안에서 딱 떠오르는 건 '엑센트릭'이에요.


사토 저는 '후타리세종'의 발레 같은 동작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하기 쉽달까.



- 그럼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곡은?


스즈모토 '안비바렌토'요. 안무도 지금까지 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고 사비 부분도 동작이 빨라서요.


사토 저도 '안비바렌토'네요. 저 원래 양손 양발을 따로따로 움직이는 걸 잘 못 해서, 이 곡은 동작도 빠르고 더 복잡해서 제일 고전했었네요.



- 역시 '안비바렌토'인가요. 특히 이 곡은 높은 기술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에게 그 기술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 모티베이션이 되는 건?


사토 세계관이나 퍼포먼스를 좋게 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모두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서일까요. 그걸 제가 할 수 있게 되면, 전체적으로 질도 높아지고 좋게 보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못 하는 부분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입니다.



- 그것도 팀을 위해서네요. 스즈모토 씨는 어떻습니까?


스즈모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 그렇군요. 정말 심플하지만, 더욱 더 신념 같은 것이 느껴지네요. 좀 심술궂은 말이지만, 만약 케야키자카46을 졸업한 뒤에 댄서나 댄스 선생님이 되지 않으면, 앞으로의 활동으로 거기까지 댄스가 요구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열중할 수 있는, 진지해질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사토 모두 각자 생각하고 있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경우에는 "그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룹을 졸업해서 이걸 하고 싶다'는 것 보다도 우선 케야키자카46을 넓혀나가고 싶어요. 케야키자카46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좋겠다는 게 머리 속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저에게 득이 될까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일보다도 지금이 가장 중요해서.


스즈모토 저도 완전히 똑같은 생각이에요. 장래에 이렇게 되고 싶다든가 이런 걸 남기고 싶다든가, 그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은 케야키자카46이 어떻게 될지, 그룹이 제일(第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닛케이 엔터테인먼트! 2019년 5월호 케야키자카46 와타나베 리사, 코바야시 유이, 코이케 미나미, 하부 미즈호 (사진, 인터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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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리사, 코바야시 유이, 코이케 미나미, 하부 미즈호


네 명 모두 '할 수 밖에 없다'는 적극적인 분위기였다



18년 12월, 히라테 유리나가 부상으로 퍼포먼스를 동반하는 활동의 휴지를 발표. 그것으로, 코바야시 유이, 스즈모토 미유, 하부 미즈호, 와타나베 리사 4명은 연말연시 각 음악방송에서 센터를 교대로 맡게 되었다. 이 그룹의 위기에서 4명은 히라테와는 다른 센터상을 보여줬고, 케야키자카46를 지켰다. 또한 센터가 바뀔 때마다 그 멤버의 포지션에 들어간 코이케 미나미가 네 가지 안무 패턴을 외웠던 것 처럼, 전원이 센터를 지탱해줬고 케야키자카46의 끈은 더욱 공고해졌다.



- '안비바렌토'(18년 8월)의 센터를 네 명이 교대로 맡게 됐다고 들었을 때는?


코바야시 그 때까지 '안비바렌토'에서 히라테가 없었을 때는 포지션을 비워두고 퍼포먼스를 했어서 다른 형태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불안은 있었지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부 처음에는 놀랐지만 '2nd YEAR ANNIVERSARY LIVE'(18년 4월)에서 '엑센트릭'('불협화음' 커플링곡, 17년 4월)의 센터에 섰던 게 자신감으로 이어져왔고, 무엇보다도 '케야키자카46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타나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전원이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 안무 담당 TAKAHIRO 씨가 네 명 각자에게 맞게 댄스를 변형했다고.


안무에 담긴 의미


코바야시 오리지널 '안비바렌토'의 안무에는 히라테이기 때문에 담긴 의미나 스토리가 있어서, 다른 멤버가 해도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져요. 저희 각각의 이미지에 맞는 '안비바렌토'를 만들어주셨어요. 저의 경우에는 모두가 쓰러져 가는 걸 보면서도 그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안무였는데, '주위가 어떻게 되든 나는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었어요. TAKAHIRO 선생님 덕분에 센터에서도 너무 기죽지 않고 저 나름대로의 퍼포먼스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부 한명 한명에게 안무에 담긴 의미를 얘기해 주셨을 때, TAKAHIRO 선생님은 정말로 우리들을 제대로 봐 주시고 있다는 걸 느꼈고, '성공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와타나베 그렇게 TAKAHIRO 선생님과 제대로 얘기할 기회는 없었는데도, 저를 알아주셔서 감사했어요.



- 4인이 센터에 서면서 코이케 씨가 그 빈 포지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코이케 이야기를 들은 순간에는 '내가 들어가면 안 된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케야키자카46 전체를 생각했더니, 이것이 다른 멤버에게 가장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해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부 미이짱(코이케)은 정말 대단해요. 하나의 포지션에서 춤 추는 것만으로도 수십번 연습해야 하는데, 4패턴의 포지션을 외우다니. 어느 위치라도 대응할 수 있게 되어서 믿음직했습니다.



- 센터 4명을 코이케 씨를 비롯한 멤버들이 지탱해줬습니다.


와타나베 아카넹(모리야 아카네)의 '리사의 댄스 좋아해'라는 말이 힘이 됐어요.


코바야시 멤버들한테는 '2일 연속 센터가 됐으니까('빛나라! 일본 레코드 대상', 'NHK 홍백가합전'), 많이 나가게 되어버렸으니까 도와줘'라고 말했어요. 실제로 모두가 따뜻한 말을 해준 덕분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코이케 유이퐁(코바야시)은 거울 앞에서 진지하게 연습하고, 스스로와 마주보고 있었어요.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아서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16년 4월 데뷔 때부터 쭉 센터에 섰던 히라테 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나요?


와타나베 각자 느끼는 게 다를테니 100%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히라테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 압박감과 싸워왔구나 싶어서 새삼 존경스러웠어요.


코바야시 '레코드 대상'에서 '안비바렌토'의 퍼포먼스가 끝난 뒤에 '내일도 센터구나'라고 중압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히라테는 그런 환경에서도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었구나 싶었어요. 제가 이번 센터에 섰을 때 멤버들이 지탱해줬던 만큼, 저도 히라테를 지금까지보다 더 지탱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홍백'에서는 코바야시 씨가 센터로 '유리를 깨라!'(18년 3월)를 피로했는데, 애드리브로 소리치는 것 등에서 기백이 전해지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코바야시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해냈을 뿐인 부분도 있었는데, 그러면 전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이 무대에서 제 안에 있는 유리를 깨고 싶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멤버도 소리쳐줘서 모두와 공명할 수 있었네요.


코이케 유이퐁의 샤우팅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저도 소리쳐버렸어요(웃음).



가사의 의미를 공유하고 싶다


- 케야키자카46의 멤버들에게는 '그룹에 공헌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코바야시 들어주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곡이 많아서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다른 쪽을 향하고 '일단은'이라는 마음이라면 절대 닿지 않겠죠. 그 생각은 '사일런트 마조리티'(16년 4월)를 만나고 나서부터 계속 했어요. 그 가사의 세계에 공감하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하니까요.


와타나베 그 때 그 때 받는 곡들이 제 상황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어떻게 아는거지'라고 언제나 이상한 기분이 돼요. 곡이 저희들에게 조언과 격려가 되어서, 깨닫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코이케 지금까지 무언가에 몰두했던 적이 없었지만 케야키자카46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부 모델 일 등을 할 때도 항상 그룹이 있기 때문이라는 마음은 잊지 않아요. 그래서 케야키자카46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 3년간 쌓아올린 1기생의 연대가 강한 만큼, 2기생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죠.


코바야시 작년 말 음악방송에 몇 명이 '안비바렌토'에 참가해서 열심히 춤 추거나, 저희들의 폭포 수행에 눈물을 흘려준 2기생들을 보면, 같이 열심히 해줄 거라는 기대감이 들어요.



- 올해의 목표는?


코이케 화면 너머로도 봐주시는 분들에게 감정을 더 전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코바야시 다같이 작품을 만든다는 의식을 높이고 지금까지보다 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곡이나 라이브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와타나베 케야키자카46는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해야하지만, 그 생각만 앞서서 주위가 보이지 않게 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하부 올해는 연호가 새롭게 바뀌죠. 그런 해에 '케야키자카46'가 트렌드 워드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와타나베 리사 퍼스트 사진집 롱 인터뷰 번역



의역, 오역 주의

퍼가실 땐 출처 남겨주세요




Risa Watanabe  Long Interview


와타나베 리사, 스무 살의 롱 인터뷰


더 많이 자신감을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전하고 싶은 것.


와타나베 리사는, 결코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다. 말하는 것 보다는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숨김 없이 말해준, 지금까지의 일.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계속 가보고 싶었던 동경하는 미국. 이번 여행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리벤지가 가능했습니다!



첫 사진집에서 처음으로 미국 상륙


사진집의 촬영이 행해진 곳은 미국 동해안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마이애미, 게다가 바하마의 수도 낫소와 엘세라 섬을 순회하는 "아일랜드 호핑" 로케. 기념할만한 1st 사진집의 발매. 그건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동경하는 장소였다'는 미국 상륙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다니던 고향의 고등학교에서는 수학여행으로 하와이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케야키자카46에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어서 도쿄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서, 결국 못 가서... 그 후로 계속 미국의 바다가 예쁘고 멋진 장소를 동경했었네요. 그래서 이번에 그 곳에 갔던 걸로 고등학교 시절의 리벤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 첫 미국의 감상은... 현지 분들이 모두 웃고 있었고 좋은 의미로 자기 고집이 있는 느낌이어서, 즐거워보였어요(웃음). 저는 일본에 있으면 아무래도 주위의 눈을 신경쓰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밝은 분위기에 도움을 받아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이애미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촬영했던 곳이 건물 전체가 핑크색인 햄버거 가게. 컬러풀한 거리에서 인스타에 올리기 좋을 것 같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엘세라 섬에서 만난 모래사장이 핑크색인 "핑크 샌드 비치"도 잊을 수 없는 경치 중 하나.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여행을 간다면 분명 몰랐을 장소라고 생각하고 "여기 오는 건 지금뿐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서 저도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가끔 그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힐링하고 있어요.


촬영 시간 틈틈이 옷이나 화장품 쇼핑, 게다가 음식도 마지막 날에 겨우 만끽.


저, 취미로 세계의 스타벅스 카드를 모으고 있어서 이번 여행에서 "마이애미"라고 써 있는 카드를 꼭 갖고 싶었어요. 최악의 경우에도, 기념품은 그것만 살 수 있다면 괜찮을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그 목표는 순조롭게 달성했습니다! 현지에 가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어서, 굉장히 기뻤어요. 계속 가고 싶었던 세포라(코스메틱 셀렉트샵)에도 갈 수 있어서, 밀크 메이크업(미국 브랜드)의 립과 하이라이터, 그리고 코디분이 알려주신 해외에서밖에 살 수 없는 브랜드의 립도 다섯 개 사버렸습니다! 다음에 언제 올 지 모르고 가지고 있는 립과 조금 색이 겹쳐도 괜찮잖아,라고 생각해서(웃음). 식사는 매일 촬영이 있어서 채소를 중심으로 요구르트나 치즈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날 낮에는 모든 촬영이 끝나고 배가 고파서 호텔 룸 서비스를 부탁했어요. 거기서 먹었던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룸서비스가 이렇게 맛있구나!"라고 감동하기도 했던 좋은 추억이. 게다가 밤에는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정말 좋아하는 새우도 만족스럽게 먹었어요. 오랜만에 여러가지를 섭취할 수 있어서 몸이 기뻐했습니다(웃음).


귀엽고, 멋지고, 천진난만한가 하고 생각하면 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른 모습이 보이는 이번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수영복 컷과 두근거리는 어른스러운 컷에도 도전했다.


다시 한번 사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고 나서, 저도 본 적 없던 표정이 많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생각하면 게임 센터에서 찍었던 사진은 꾸밈 없이 웃는다든가. 윙크하고 있는 사진이나 핑크색 벽 앞에서 찍은 얼굴 여덟 컷은 팬분들에게도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란제리 컷을 찍을 때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멋진 방의 분위기 덕분에 너무 긴장하지 않고 즐겁게 촬영에 임했습니다. 샤워 컷에 관해서는, 사실 처음에는 찍을 예정이 없었는데, 욕실 유리의 흐린 상태가 좋은 것 같아서 "아무튼 해보자!"라고 돼서(웃음). ...좋은 느낌이 되었나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괄량이이지만 사람 앞에 서는 게 서툴었던 어린 시절


1998년 7월 27일, 와타나베가의 장녀로 출생. 이바라키현의 자연이 풍부한 마을에서 강이나 논에 둘러싸여 자란 유소년기는 말괄량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때였을까요, 친구들 사이에서 신발에 붙어 있는 타입의 롤러 스케이트가 유행했어요. 저도 부모님이 그걸 사주셔서 자주 놀았습니다. 집 근처에 포장된지 얼마 안 돼서 매끈한 아스팔트 길이 좋아서, 어느 날 친구가 로프를 잡아당겨주면서 맹 스피드로 달렸더니, 도중에 제대로 넘어져서 폭풍눈물! 지금도 무릎에는 그 때의 상처가 조금 남아있을 정도로 큰 부상으로, 엄청나게 아파서... 생각만 해도 아프네요(웃음). 그 외에도 한눈 팔고 있다가 시궁창에 떨어져서 다치거나 자전거 바퀴에 발이 껴서 부딪히거나... 아무튼 상처가 끊이지 않는 아이였어요. 밖에서 노는 게 좋아서 소꿉놀이도 둑 같은 곳에서 했습니다. 그 근처에 나 있는 풀을 뽑아서 "스프가 됐어~"라든지(웃음). 사촌이 남자아이밖에 없어서 게임도 자주 했습니다. 다섯 살 때쯤에는 이미 오빠의 닌텐도DS나 플레이스테이션을 마음대로 빌려서 놀았으니까요. '나의 여름방학'이라는 게임을 좋아했어요. 게임 속에서 매미를 잡거나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주인공 남자아이의 여름방학을 진행해나갔어요. 또, 헬리콥터를 타고 무언가를 찾는 탈출 게임같은 것도 좋아했는데 제목이 생각이 안 나요... 당시에 다니던 보육원에서 기억에 남는 건 맨발로 뜰을 뛰어다니던 것과 진흙 경단 만들기. 3일이 걸려서 진흙 경단을 만들어서 친구들 중에 누가 제일 딱딱하게 만든지 승부를 겨뤘습니다. 시간 경과와 함께 변하는 수분량을 계산하는 게 포인트인데요 저는 잘하는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보육원에서는 거북이나 가재를 키우고 있었어서, 먹이를 주거나 수조를 청소하는 계도 있고 연장자가 되면 그걸 매일 바꿔서 담당해야 했어요. 생물을 돌보는 건 좋아했지만 가재의 알이 기분나빠서... 하지만 수조를 씻을 때는 가재를 일단 양동이로 이동시켜야 하니까, 그 때는 내심 좀 싫다고 생각하면서 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어쨌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던 아이였네요. 학예회에서는 눈에 띄는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무 역할을 하는 타입이었거든요.



연습도 상하관계도 엄격했던 중학교 배구부. 지금은 '엄격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웃음)



수많은 팬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 추는 아이돌이라는 현재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보육원 시절. 그것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고.


국어 수업 때 가끔 교실 앞에 나가서 이야기의 등장인물의 기분이 되어서 교과서를 읽어야 할 때가 있었어요. 저는 그게 정말 싫어서... 그룹별로 담당을 정할 때는 읽는 문장의 양이 가장 적은 역을 골라서, 얼마나 눈에 띄지 않게 할지 필사적이었어요. 쉬는 시간 같은 때는 항상 친한 여자 친구 3~4명이서 있었는데, 친구 사이에서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친한 그룹 안에서 갑자기 네잎 클로버 모티브가 유행했던 적이 있네요. 다들 필통이나 책받침같은 주변 물품을 클로버로 통일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 의문(웃음). 본가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면 분명 아직 그 편린이 남아있을 거예요... 그 후에 고학년이 됐을 때는 프로필장이 엄청 유행해서 저도 일단은 학교에 가져가서 교환했었네요. 황록색, 하늘색, 오렌지색같은 여성스럽지 않은 색도 인기여서, 부모님이 사주신 자전거도 하늘색이었어요. 주변 친구들도 좋아하는 색이 핑크인 사람이 없고 다들 시원시원한 느낌이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고향의 중학교에 진학. 연습이나 상하관계의 엄격함으로 교내에서도 1,2등을 다투는 배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학교 규칙으로 부활동은 꼭 해야해서, 처음엔 양 쪽 다 귀여운 선배가 있던 테니스부나 배구부 중에 고민했어요. 그런데 테니스는 야외에서 하니까 덥고 햇빛에 탈 것 같다고 생각해서(웃음) 배구부에 들어갔어요. 다만 결과적으로는 체육관에서 하는 배구도 푹푹 찌고 엄청 더웠지만요(웃음). 게다가 들어가기 전에는 배구부가 그렇게 하드하다는 걸 몰랐어서... 제가 있을 때에도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강한 학교였으니까 확실히 연습은 힘들었어요. 1학년은 누구보다 먼저 체육관에 가서 연습 준비를 하고, 끝나면 뒷정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게 대대로 내려오는 규칙. 힘들었지만 그래도 3년 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도중에 그만두면 고등학교 수험에 필요한 내신점수에 영향을 줄 거라는 불안도 있었고(웃음). 무엇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볼을 만질 수 있는 시간도 늘었고 2학년 여름에는 센터 포지션도 하게 돼서, 즐거운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네요. 인사의 중요함이나 주위를 신경쓰거나,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것도 부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연습도 상하관계도 엄격해서 좋았다고 생각해요(웃음). 연습은 토요일, 일요일에도 있어서 유일하게 놀았던 건 오전연습이 끝난 뒤의 휴일 오후. 그런 날엔 친구와 고향의 쇼핑몰에 놀러 가서 쇼핑을 하거나 포토 씰을 찍으면서 놀았어요.

2학년 쯤부터 주변에서 다들 서서히 화장을 시작해서, 저도 엄마의 화장품을 빌려서 본 대로 따라 해보기도 하고 친구한테 골라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패션잡지의 메이크업 페이지도 참고했고, 당시 즐겨 읽던 게 논노. 키리타니 미레이 씨나 사토 아리사 씨가 전속모델을 하고 있었고, 좋아하는 두 사람의 사진을 라인 프로필으로 해뒀어요. 옷도 그 때는 귀여운 테이스트나 파스텔 컬러 아이템을 좋아했고 INGNI이나 titty&Co., dazzling을 엄마가 자주 사주셨어요. 인생에서 제일 달콤한 옷을 입던 시기예요.(웃음) 공부는 평균을 내면 보통 정도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좋아하는 사회만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수학은 "어라?"하게 되는 완전히 문과여자였네요. 사회 중에서도 역사, 특히 옛날 사람이 지은 고대 건축물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를 여행하면서 눈으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고 싶어요.



충실한 "The JK(여고생)!"생활에서 뛰어든 예능계


고등학교는 교사(校舍)가 정말 멋지고 교복도 종류가 몇 가지 있어서 그 중에 자기가 커스터마이즈하는 게 가능한 타입의 학교였어요. 그 교복이 입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도 있는 것 같네요(웃음). 고등학교 생활은 엄청 즐겁고 충실해서, "The JK!"였던 하루하루. 부활동은 하지 않아서 방과 후에는 교복을 입은 채로 친구와 조금 도심으로 나가서 놀거나, 시험 전에는 스타벅스에서 공부하거나 했어요. 중학교 시절에 부활동 때문에 못 놀았던 만큼, 한번에 해방된 느낌이었어요(웃음). 항상 같이 있던 건, 6명의 친한 친구 그룹. 그 때까지 저는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 4명이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이 6명은 전혀 부딪히거나 한 적도 없었어요.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밥을 먹으러 가는 사이네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여고생. 그런 나날들에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케야키자카46(당시 토리이자카46)의 오디션을 보는 걸 추천해 준 게 계기였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응모해보는 건 어때?" 같은 가벼운 느낌이었다고 생각해요. 오빠에게도 "재밌을 것 같잖아!"라고 들어서 완전히 분위기와 기세로만 응모해버렸네요. 게다가 서류 심사의 응모 방법이 간단해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제 사진을 첨부해서 규정된 폼에 필요사항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것도 컸어요.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된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만들기. 초등학생 때부터 보육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 갈 학교를 어느 정도 정해서, 자료 청구도 끝내놨었어요. 그래서 서류심사에 합격하고 2차 심사의 통지를 받았을 때는 "왜 모르는 회사에서 편지가 온 거지?"하고 감이 안 왔을 정도로, (오디션은) 제 안에서 중요도가 낮았어요. 하지만 2차 심사에는 갔습니다. 이유는 귀찮은 마음보다도 "이런 오디션의 이면은 어떻게 되어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에요.

2차 심사에서 했던 건 자기 어필과 테스트 촬영. 머리를 예쁘게 말고 세련된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여자 아이들이 잔뜩 있는 가운데, 저는 데님 숏팬츠에 티셔츠라는 심플한 모습으로 가서 역시 조금 초조했습니다(웃음). 자기 어필에서는 다들 악기를 연주하거나 여러 특기를 보여주거나 했지만, 저는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끝... 역시 이걸로 이제 다음엔 불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3차 심사의 상세 정보를 알려주는 전화가 왔어요. 심사 내용은 가창 테스트와 노기자카46의 '태양 노크'의 사비 부분 댄스를 외워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비라고 하는 게 첫 번째 사비인지 오오사비인지 몰라서 "뭐 당일에 누군가한테 배우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들뜬 기분으로 회장에 갔습니다. 그 때는 아직 제가 합격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연습해서 완벽히 외워서 합격하자!"같은 마음까지는 아니었어요. 최종 심사. 후보자가 점점 줄어가는 가운데 일찌감치 떨어질 것 같던 제가 남아 있었고... 그래도 그 때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까지 남고 싶다"라는 마음이 싹트고 있던 것 같아요.



오디션 합격 후, 도쿄에 갈지 말지 고민했던 내 등을 밀어준 건, 친구의 말



최종 심사에서는 전 응모자 2만 2509명에서 22명의 합격자가 결정. 그 중에는 와타나베 리사의 모습도 보였다.


오디션을 보고 있던 건 응모하라고 추천해준 친구에게만 말했어서, 합격한 것도 학교에서는 그 친구밖에 몰랐어요. 합격한 후에는 항상 함께 지내던 친한 친구들에게 전학가는 건 말했지만, 한 달 동안 평범히 학교를 다니고 그대로 도쿄의 고등학교로 전학. 그 한 달 동안은 정말로 도쿄에 갈까 그만둘까, 사실은 꽤 고민했어요. 고등학교 생활이 정말로 즐거웠기 때문에, 일부러 그걸 버리면서까지 아이돌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는지. 하지만 거기서 등을 밀어준 것도 역시 그 친한 친구로 "모처럼 붙었으니까 일단 해봐".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도쿄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케야키자카46로 데뷔. 그저, 필사적이었다.


상경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어쨌든 레슨을 받는 매일매일. 댄스, 워킹, 모델, 노래, 연기... 요일마다 분야가 달라서 솔직히 이제 그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웃음). 지금이라면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아직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멤버끼리도 마음을 터놓지 못 하고 "이 애는 누굴까?"라는 상태. 새로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레귤러 방송 '케야키라고, 쓸 수 없어?'의 녹화가 시작되고 그라비아 잡지에 나오게 되면서 서서히 실감이 난다고 할까, "아이돌이란 게 이런 거구나"라고 조금씩 익숙해져갔고... 예를 들면 저녁인데도 "오하요고자이마스(아침 인사)"라고 인사하거나, 잡치 촬영 현장에는 많은 스태프 분들이 있고, 그 모든 분들이 저를 만들어 주시거나.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논노는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라고 감동도 했습니다.

멤버는 저를 포함해서 모두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에는 좀처럼 깊은 관계가 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레슨을 거듭하면서 점점 긴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2016년 여름에 멤버 전원이 출연했던 드라마 '토쿠야마 다이고로를 누가 죽였을까?'가 굉장히 컸달까. 아침부터 밤까지 다 같이 촬영했었기 때문에 휴식시간은 필연적으로 멤버끼리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아서 모두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던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드라마 방송부터 3개월 거슬러 오르면, 2016년 4월에는 케야키자카46의 데뷔 싱글 '사일런트 마조리티'가 발매. 초동 26만 2000장이라는 숫자는 오리콘 1위를 기록. 게다가 여성 아티스트 데뷔 싱글 초동 기록을 새로 쓴 케야키자카46은 더할 나위 없는 눈부신 스타트를 끊었다.


오리콘 1위라든지, 역대 1위, 물론 굉장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의 저희들은 무엇이 어떻게 대단한지를 몰라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친구나 주변 스태프 분들이 "좋은 곡이네"라고 말해주는 건 기뻤네요. 2016년은 그 뒤로도 2번째, 3번째 싱글을 발매하고 첫 원맨 라이브를 개최, 그리고 연말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 그 한창 때에 있던 저는, 그저 눈 앞에 있는 걸 필사적으로 해나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이 1년동안 인생의 모든 걸 경험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건 '홍백'에 대해선 극도의 긴장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나중에 방송을 다시 보고도 스테이지 위에 있는 건 내가 아닌 것 같고... 지금 그 때의 저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출연할 수 있으니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2016년 12월 31일의 저는 그렇게 말해도 절대 믿지 않을 것 같지만요(웃음).



모델 일이, 카메라에 대한 의식을 바꿔줬다


2017년의 와타나베 리사를 말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일 중 하나. 그건, 논노의 전속모델로 결정되어서, 케야키자카46에서 처음으로 패션지 전속모델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무소의 스태프 분으로부터 논노 모델 오디션을 받지 않겠냐고 들었을 때는 솔직히 "또 오디션을 보는 건가..."라고(웃음). 케야키자카46의 오디션에서 몇 번이나 저를 어필하지 않으면 안 됐던 괴로운 기억이 되살아나고 말았습니다. 논노의 오디션에서는 다른 응모자 분들이 논노 모델이 되고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마음가짐을 말하는 중에 저는 "논노 모델이 되면 케야키자카46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었네요. 지금 생각하면 논노를 발판으로...같은 실례인 발언이었다고 반성하고 있지만요(쓴웃음).

하지만 그 때는 "내가 논노 모델이 되는 게 케야키자카46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만 앞섰습니다. 그런 저를 논노 모델로 뽑아주신 편집부 분들에게는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해요. 합격했을 때는 계속 읽었던 잡지에 제가 나온다는 이상한 기분과 여러 옷이나 화장에 도전할 수 있다는 두근두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논노 모델이 되고 기뻤던 건 많지만, 그 중 하나가 전부터 동경했던 아라키 (유코) 씨와 1년 째에 같이 촬영했던 것! 게다가, 그 이후 촬영장이나 패션쇼에서 만나면 "릿짱"이라고 불러주시는 게 기뻤어요. 저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 아라키 씨와 고등학교 친구들 뿐이었습니다. 악수회에에 와주시는 여자 팬 분들이 많아진 것도, 정말 기뻤어요. "논노를 보고 좋아하게 돼서, 케야키자카46의 곡도 듣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오디션에서 말했던 게 조금은 실현되었구나, 싶었어요.



센터를 짊어질 수 없었던, 2017년. 이대로라면 "그룹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2017년 6월호부터 지면을 장식하게 되어서, 발군의 스타일과 쿨 뷰티 분위기로 바로 인기모델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모델 일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들 뿐이었다고.


어쨌든 포즈나 움직이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저 스스로도 "몇 번이나 똑같은 포즈를 하고 있구나"라고 낙담하면서도, 레퍼토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조금이라도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완성된 논노를 보고 다른 모델분은 저와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포즈를 하는지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다음 촬영에서 시험해봤어요. 그걸 반복해 가면서, 의외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범위보다 크게 움직이는 편이 좋구나, 라든지 카메라맨 분과 편집하는 분들이 "좋아"라고 말해준 동작은 나오는구나,라고 제 안에서 확인하거나.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점점 촬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델 일을 시작하고 제일 크게 변했다고 느끼는 건 카메라가 어렵다는 의식이 없어진 것. 원래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어렸을 때의 사진도 별로 남아있지 않아요. 케야키자카46도 그렇게 웃는 얼굴로 찍는 촬영이 많지 않은 그룹이어서,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 웃는 것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제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컸어요. 제가 웃는 얼굴을 보고 촬영 중에 텐션이 낮아지는 걸 피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 나오는 모니터를 보지 않았을 정도로(웃음).

하지만 2018년 정도부터는 의식을 바꿔서 다 찍고 난 뒤에 흘끗 한 번 보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의 각도나 방향에 따라 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쪽에서 찍힐 때가 많은지, 턱을 너무 드는 버릇... 막상 체크하게 되니 깨닫게 된 게 많았어요. 제 웃는 얼굴을 보고 위축되는 것도 없어졌고, 그 때의 표정을 받아들이고 다음 번에 살리게 된 것 같아요. 모델 일을 할 때, 웃는 얼굴은 옷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 지금의 목표는 아라키 씨 처럼 보시는 분이 밝고 힘이 날 수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사진은 정지화면이기 때문에 동영상에 비해 전해지는 정보량이 제한적이지만, 그만큼 포즈나 표정을 좀 더 연구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2019년 5월호에서는, 첫 단독 표지를 장식하게 된 것도 화제에.


패션지의 표지는 모델 일을 하는 이상, 누구나 한번은 동경하는 것. 2018년에도 한 번 니시노 나나세 씨와 투샷 표지를 했었는데, 그 때는 니시노 씨 덕분에 저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단독 표지의 꿈을 이뤘을 때는 전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었습니다. 표지 촬영은 다른 페이지 촬영을 하는 중간에 찍어서, 좋은 의미로 "표지!"라는 느낌이 없었어요. 의상이 평소 제가 입는 것 같은 파란 셔츠였기도 해서, 너무 긴장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센터 히라테의 부재를 지탱해준 친구의 존재


모델로서 순조롭게 활동하는 한편, 2017년에는 케야키자카46로서도 4th 싱글 '불협화음'을 릴리즈. 그 다음 날에는 데뷔 1주년을 기념한 라이브가 열리고, 여름의 야외 원맨 라이브 '케야키공화국2017'도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그 후 1st 앨범 '새하얀 것은 더럽히고 싶어져'의 전국 투어 중, 데뷔 때부터 센터를 맡아온 히라테 유리나의 컨디션 불량으로 인한 부재라는 긴급 사태가 발생한다.


리허설에서는 히라테가 히라테가 나오지 않는 경우를 대비해서 몇 명의 멤버가 대리로 센터에 설 준비를 했어요. 저도 한 곡을 담당하게 되어서 안무도 외웠는데, 막상 전체 리허설이 시작되서 서는 위치를 확인하니까 "나는 무리야"라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울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평소에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멤버인 후짱(사이토 후유카)도 울고, 이제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거기서 일단 스태프 분에게 히라테도 같이 멤버끼리만 대화하는 시간을 받았어요. 모두 여러가지를,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그 날은 결국 전원이 스테이지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공연은 역시 히라테의 컨디션도 돌아오지 못한 채로 계속되어서... 2017년은... 솔직히, 올해로 그룹이 끝나는 게 아닐까, 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전국 투어도 잘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보러 와 주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각 멤버가 많든 적든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낙담하고 있던" 시기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시기에도 제가 정신적으로 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향 친구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친구와 밥을 먹고, 실없는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케야키자카46이 아닌 저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서 파워를 충전하고 다시 케야키자카46을 위해 힘을 내고. 그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센터가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센터를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은 도망쳤던 센터와 마주한 뒤, 보였던 것


그리고, 2018년. 데뷔일인 4월 6일부터 3일 간, 케야키자카46의 '2nd YEAR ANNIVERSARY LIVE'를 개최. 거기서, 리사는 '피뢰침'과 '월요일 아침, 스커트를 잘렸다', 두 곡의 센터에 서게 되었다.


스태프 분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전년도 투어에서 할 수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해서 "이번엔 절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는 못 한다고 할 때가 아니야"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케야키자카46의 많은 곡들은 한 명의 주인공과 그를 지지해주는 사람이나 방관자들이라는 세계관. 그걸 더욱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퍼포먼스도 가사에 맞춰져 있어서, 충분히 곡의 세계관에 빠지고 정신적으로도 끌려가는 게 많습니다. 그만큼 들어주시는 분들에게 닿을 거라고 생각했고, 제가 그 주인공이 되기에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히라테의 과거 퍼포먼스는 전혀 보지 않고, 저 나름대로 노력하자고 생각하고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첫 센터. 그건, 그룹의 가운데에 서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해준 일이기도 했다.


그 경험은 저에게 정말 정말 컸어요. 느끼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센터라는 포지션은 주변에 그럴 생각이 없어도, 멋대로 멤버와의 거리를 느끼는 고독한 곳이었습니다. 데뷔하고 2년동안 그런 감정을 혼자서 끌어안고 싸워 온 히라테는... 대단해요.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을 깎아가면서까지 계속 서 주었구나, 라고. 실은 그 때, 히라테가 저희 집에 와서 둘이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히라테는 영화 촬영 중이어서 "촬영은 어때?"라고 물어보거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시시한 얘기를 하고 웃거나. 정말로 평범한,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지만 "계속 같이 활동했지만,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해에는, 연말 음악 방송에서 피로한 '안비바렌토'에서도 두 번째로 센터를 맡았다.


그 때는... 물론 긴장도 부담도 있었지만, 애니버서리 라이브에서 센터를 했던 만큼, 그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고 할 수 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른 프로그램도 포함해서 연말은 프론트 멤버 네 명이 센터를 돌아가면서 무대에 섰는데, 제가 아닌 멤버가 센터에 서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느낀 게 있었어요. 저, 그 때까지는 센터가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걸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역할은 절대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센터에 얹어주지 않으면 센터도 기분이 오르지 않는다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지지해주면서도 센터를 이끌어줘야 해요. 똑같은 "지지해준다"지만,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해야할까... 연말의 그 경험 속에서 저는 지금까지 센터를 지지해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룹 존속의 위기에, 센터라는 높은 벽. 괴로운 만큼 소중한 것을 깨닫고, 성장했다. 와타나베 리사는, 케야키자카46의 멤버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음... 뭐랄까, 뭐랄까요. 뭔가 "이걸 해 보고 싶다"는 게 구체적으로 보여지면, 일도 더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는 이걸 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자신이 있다면, 세계가 더욱 넓어지지 않을까요. 계속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걸 찾을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좀 더 제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자신감을 갖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 그리고 그 말 자체로 이전보다 좀 더 자신감이 엿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고 있는 걸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케야키자카46 활동을 하면서 전하고 싶은 건 말하는 편이 좋다고 느끼는 기회가 늘었어요. 그걸 조금씩 실천하고 있는 게, 자신감이 생겼다고 생각해주시는 요인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발언이 새로운 일로 이어지는 것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더 발신해 나가고 싶어요. 이 사진집도 그런 계기의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와타나베 리사는, 역시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말 하나하나에서 강한 의지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래도 역시 이때다 싶을 때는 노력이나 고민을 그저 숨겨버리겠지. 부끄러움을 잘 타던 소녀의 "과묵"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인함과 부드러움과 각오의 상징이 되었다. "과묵"한 그녀는 지금, 부드럽게 날아오르고 있다.

non-no (논노) 2019년 6월호 와타나베 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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