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리사 퍼스트 사진집 롱 인터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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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a Watanabe  Long Interview


와타나베 리사, 스무 살의 롱 인터뷰


더 많이 자신감을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전하고 싶은 것.


와타나베 리사는, 결코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다. 말하는 것 보다는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숨김 없이 말해준, 지금까지의 일.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계속 가보고 싶었던 동경하는 미국. 이번 여행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리벤지가 가능했습니다!



첫 사진집에서 처음으로 미국 상륙


사진집의 촬영이 행해진 곳은 미국 동해안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마이애미, 게다가 바하마의 수도 낫소와 엘세라 섬을 순회하는 "아일랜드 호핑" 로케. 기념할만한 1st 사진집의 발매. 그건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동경하는 장소였다'는 미국 상륙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다니던 고향의 고등학교에서는 수학여행으로 하와이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케야키자카46에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어서 도쿄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서, 결국 못 가서... 그 후로 계속 미국의 바다가 예쁘고 멋진 장소를 동경했었네요. 그래서 이번에 그 곳에 갔던 걸로 고등학교 시절의 리벤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 첫 미국의 감상은... 현지 분들이 모두 웃고 있었고 좋은 의미로 자기 고집이 있는 느낌이어서, 즐거워보였어요(웃음). 저는 일본에 있으면 아무래도 주위의 눈을 신경쓰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밝은 분위기에 도움을 받아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이애미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촬영했던 곳이 건물 전체가 핑크색인 햄버거 가게. 컬러풀한 거리에서 인스타에 올리기 좋을 것 같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엘세라 섬에서 만난 모래사장이 핑크색인 "핑크 샌드 비치"도 잊을 수 없는 경치 중 하나.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여행을 간다면 분명 몰랐을 장소라고 생각하고 "여기 오는 건 지금뿐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서 저도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가끔 그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힐링하고 있어요.


촬영 시간 틈틈이 옷이나 화장품 쇼핑, 게다가 음식도 마지막 날에 겨우 만끽.


저, 취미로 세계의 스타벅스 카드를 모으고 있어서 이번 여행에서 "마이애미"라고 써 있는 카드를 꼭 갖고 싶었어요. 최악의 경우에도, 기념품은 그것만 살 수 있다면 괜찮을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그 목표는 순조롭게 달성했습니다! 현지에 가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어서, 굉장히 기뻤어요. 계속 가고 싶었던 세포라(코스메틱 셀렉트샵)에도 갈 수 있어서, 밀크 메이크업(미국 브랜드)의 립과 하이라이터, 그리고 코디분이 알려주신 해외에서밖에 살 수 없는 브랜드의 립도 다섯 개 사버렸습니다! 다음에 언제 올 지 모르고 가지고 있는 립과 조금 색이 겹쳐도 괜찮잖아,라고 생각해서(웃음). 식사는 매일 촬영이 있어서 채소를 중심으로 요구르트나 치즈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날 낮에는 모든 촬영이 끝나고 배가 고파서 호텔 룸 서비스를 부탁했어요. 거기서 먹었던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룸서비스가 이렇게 맛있구나!"라고 감동하기도 했던 좋은 추억이. 게다가 밤에는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정말 좋아하는 새우도 만족스럽게 먹었어요. 오랜만에 여러가지를 섭취할 수 있어서 몸이 기뻐했습니다(웃음).


귀엽고, 멋지고, 천진난만한가 하고 생각하면 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른 모습이 보이는 이번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수영복 컷과 두근거리는 어른스러운 컷에도 도전했다.


다시 한번 사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고 나서, 저도 본 적 없던 표정이 많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생각하면 게임 센터에서 찍었던 사진은 꾸밈 없이 웃는다든가. 윙크하고 있는 사진이나 핑크색 벽 앞에서 찍은 얼굴 여덟 컷은 팬분들에게도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란제리 컷을 찍을 때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멋진 방의 분위기 덕분에 너무 긴장하지 않고 즐겁게 촬영에 임했습니다. 샤워 컷에 관해서는, 사실 처음에는 찍을 예정이 없었는데, 욕실 유리의 흐린 상태가 좋은 것 같아서 "아무튼 해보자!"라고 돼서(웃음). ...좋은 느낌이 되었나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괄량이이지만 사람 앞에 서는 게 서툴었던 어린 시절


1998년 7월 27일, 와타나베가의 장녀로 출생. 이바라키현의 자연이 풍부한 마을에서 강이나 논에 둘러싸여 자란 유소년기는 말괄량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때였을까요, 친구들 사이에서 신발에 붙어 있는 타입의 롤러 스케이트가 유행했어요. 저도 부모님이 그걸 사주셔서 자주 놀았습니다. 집 근처에 포장된지 얼마 안 돼서 매끈한 아스팔트 길이 좋아서, 어느 날 친구가 로프를 잡아당겨주면서 맹 스피드로 달렸더니, 도중에 제대로 넘어져서 폭풍눈물! 지금도 무릎에는 그 때의 상처가 조금 남아있을 정도로 큰 부상으로, 엄청나게 아파서... 생각만 해도 아프네요(웃음). 그 외에도 한눈 팔고 있다가 시궁창에 떨어져서 다치거나 자전거 바퀴에 발이 껴서 부딪히거나... 아무튼 상처가 끊이지 않는 아이였어요. 밖에서 노는 게 좋아서 소꿉놀이도 둑 같은 곳에서 했습니다. 그 근처에 나 있는 풀을 뽑아서 "스프가 됐어~"라든지(웃음). 사촌이 남자아이밖에 없어서 게임도 자주 했습니다. 다섯 살 때쯤에는 이미 오빠의 닌텐도DS나 플레이스테이션을 마음대로 빌려서 놀았으니까요. '나의 여름방학'이라는 게임을 좋아했어요. 게임 속에서 매미를 잡거나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주인공 남자아이의 여름방학을 진행해나갔어요. 또, 헬리콥터를 타고 무언가를 찾는 탈출 게임같은 것도 좋아했는데 제목이 생각이 안 나요... 당시에 다니던 보육원에서 기억에 남는 건 맨발로 뜰을 뛰어다니던 것과 진흙 경단 만들기. 3일이 걸려서 진흙 경단을 만들어서 친구들 중에 누가 제일 딱딱하게 만든지 승부를 겨뤘습니다. 시간 경과와 함께 변하는 수분량을 계산하는 게 포인트인데요 저는 잘하는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보육원에서는 거북이나 가재를 키우고 있었어서, 먹이를 주거나 수조를 청소하는 계도 있고 연장자가 되면 그걸 매일 바꿔서 담당해야 했어요. 생물을 돌보는 건 좋아했지만 가재의 알이 기분나빠서... 하지만 수조를 씻을 때는 가재를 일단 양동이로 이동시켜야 하니까, 그 때는 내심 좀 싫다고 생각하면서 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어쨌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던 아이였네요. 학예회에서는 눈에 띄는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무 역할을 하는 타입이었거든요.



연습도 상하관계도 엄격했던 중학교 배구부. 지금은 '엄격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웃음)



수많은 팬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 추는 아이돌이라는 현재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보육원 시절. 그것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고.


국어 수업 때 가끔 교실 앞에 나가서 이야기의 등장인물의 기분이 되어서 교과서를 읽어야 할 때가 있었어요. 저는 그게 정말 싫어서... 그룹별로 담당을 정할 때는 읽는 문장의 양이 가장 적은 역을 골라서, 얼마나 눈에 띄지 않게 할지 필사적이었어요. 쉬는 시간 같은 때는 항상 친한 여자 친구 3~4명이서 있었는데, 친구 사이에서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친한 그룹 안에서 갑자기 네잎 클로버 모티브가 유행했던 적이 있네요. 다들 필통이나 책받침같은 주변 물품을 클로버로 통일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 의문(웃음). 본가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면 분명 아직 그 편린이 남아있을 거예요... 그 후에 고학년이 됐을 때는 프로필장이 엄청 유행해서 저도 일단은 학교에 가져가서 교환했었네요. 황록색, 하늘색, 오렌지색같은 여성스럽지 않은 색도 인기여서, 부모님이 사주신 자전거도 하늘색이었어요. 주변 친구들도 좋아하는 색이 핑크인 사람이 없고 다들 시원시원한 느낌이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고향의 중학교에 진학. 연습이나 상하관계의 엄격함으로 교내에서도 1,2등을 다투는 배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학교 규칙으로 부활동은 꼭 해야해서, 처음엔 양 쪽 다 귀여운 선배가 있던 테니스부나 배구부 중에 고민했어요. 그런데 테니스는 야외에서 하니까 덥고 햇빛에 탈 것 같다고 생각해서(웃음) 배구부에 들어갔어요. 다만 결과적으로는 체육관에서 하는 배구도 푹푹 찌고 엄청 더웠지만요(웃음). 게다가 들어가기 전에는 배구부가 그렇게 하드하다는 걸 몰랐어서... 제가 있을 때에도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강한 학교였으니까 확실히 연습은 힘들었어요. 1학년은 누구보다 먼저 체육관에 가서 연습 준비를 하고, 끝나면 뒷정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게 대대로 내려오는 규칙. 힘들었지만 그래도 3년 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도중에 그만두면 고등학교 수험에 필요한 내신점수에 영향을 줄 거라는 불안도 있었고(웃음). 무엇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볼을 만질 수 있는 시간도 늘었고 2학년 여름에는 센터 포지션도 하게 돼서, 즐거운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네요. 인사의 중요함이나 주위를 신경쓰거나,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것도 부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연습도 상하관계도 엄격해서 좋았다고 생각해요(웃음). 연습은 토요일, 일요일에도 있어서 유일하게 놀았던 건 오전연습이 끝난 뒤의 휴일 오후. 그런 날엔 친구와 고향의 쇼핑몰에 놀러 가서 쇼핑을 하거나 포토 씰을 찍으면서 놀았어요.

2학년 쯤부터 주변에서 다들 서서히 화장을 시작해서, 저도 엄마의 화장품을 빌려서 본 대로 따라 해보기도 하고 친구한테 골라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패션잡지의 메이크업 페이지도 참고했고, 당시 즐겨 읽던 게 논노. 키리타니 미레이 씨나 사토 아리사 씨가 전속모델을 하고 있었고, 좋아하는 두 사람의 사진을 라인 프로필으로 해뒀어요. 옷도 그 때는 귀여운 테이스트나 파스텔 컬러 아이템을 좋아했고 INGNI이나 titty&Co., dazzling을 엄마가 자주 사주셨어요. 인생에서 제일 달콤한 옷을 입던 시기예요.(웃음) 공부는 평균을 내면 보통 정도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좋아하는 사회만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수학은 "어라?"하게 되는 완전히 문과여자였네요. 사회 중에서도 역사, 특히 옛날 사람이 지은 고대 건축물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를 여행하면서 눈으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고 싶어요.



충실한 "The JK(여고생)!"생활에서 뛰어든 예능계


고등학교는 교사(校舍)가 정말 멋지고 교복도 종류가 몇 가지 있어서 그 중에 자기가 커스터마이즈하는 게 가능한 타입의 학교였어요. 그 교복이 입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도 있는 것 같네요(웃음). 고등학교 생활은 엄청 즐겁고 충실해서, "The JK!"였던 하루하루. 부활동은 하지 않아서 방과 후에는 교복을 입은 채로 친구와 조금 도심으로 나가서 놀거나, 시험 전에는 스타벅스에서 공부하거나 했어요. 중학교 시절에 부활동 때문에 못 놀았던 만큼, 한번에 해방된 느낌이었어요(웃음). 항상 같이 있던 건, 6명의 친한 친구 그룹. 그 때까지 저는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 4명이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이 6명은 전혀 부딪히거나 한 적도 없었어요.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밥을 먹으러 가는 사이네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여고생. 그런 나날들에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케야키자카46(당시 토리이자카46)의 오디션을 보는 걸 추천해 준 게 계기였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응모해보는 건 어때?" 같은 가벼운 느낌이었다고 생각해요. 오빠에게도 "재밌을 것 같잖아!"라고 들어서 완전히 분위기와 기세로만 응모해버렸네요. 게다가 서류 심사의 응모 방법이 간단해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제 사진을 첨부해서 규정된 폼에 필요사항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것도 컸어요.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된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만들기. 초등학생 때부터 보육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 갈 학교를 어느 정도 정해서, 자료 청구도 끝내놨었어요. 그래서 서류심사에 합격하고 2차 심사의 통지를 받았을 때는 "왜 모르는 회사에서 편지가 온 거지?"하고 감이 안 왔을 정도로, (오디션은) 제 안에서 중요도가 낮았어요. 하지만 2차 심사에는 갔습니다. 이유는 귀찮은 마음보다도 "이런 오디션의 이면은 어떻게 되어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에요.

2차 심사에서 했던 건 자기 어필과 테스트 촬영. 머리를 예쁘게 말고 세련된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여자 아이들이 잔뜩 있는 가운데, 저는 데님 숏팬츠에 티셔츠라는 심플한 모습으로 가서 역시 조금 초조했습니다(웃음). 자기 어필에서는 다들 악기를 연주하거나 여러 특기를 보여주거나 했지만, 저는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끝... 역시 이걸로 이제 다음엔 불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3차 심사의 상세 정보를 알려주는 전화가 왔어요. 심사 내용은 가창 테스트와 노기자카46의 '태양 노크'의 사비 부분 댄스를 외워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비라고 하는 게 첫 번째 사비인지 오오사비인지 몰라서 "뭐 당일에 누군가한테 배우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들뜬 기분으로 회장에 갔습니다. 그 때는 아직 제가 합격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연습해서 완벽히 외워서 합격하자!"같은 마음까지는 아니었어요. 최종 심사. 후보자가 점점 줄어가는 가운데 일찌감치 떨어질 것 같던 제가 남아 있었고... 그래도 그 때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까지 남고 싶다"라는 마음이 싹트고 있던 것 같아요.



오디션 합격 후, 도쿄에 갈지 말지 고민했던 내 등을 밀어준 건, 친구의 말



최종 심사에서는 전 응모자 2만 2509명에서 22명의 합격자가 결정. 그 중에는 와타나베 리사의 모습도 보였다.


오디션을 보고 있던 건 응모하라고 추천해준 친구에게만 말했어서, 합격한 것도 학교에서는 그 친구밖에 몰랐어요. 합격한 후에는 항상 함께 지내던 친한 친구들에게 전학가는 건 말했지만, 한 달 동안 평범히 학교를 다니고 그대로 도쿄의 고등학교로 전학. 그 한 달 동안은 정말로 도쿄에 갈까 그만둘까, 사실은 꽤 고민했어요. 고등학교 생활이 정말로 즐거웠기 때문에, 일부러 그걸 버리면서까지 아이돌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는지. 하지만 거기서 등을 밀어준 것도 역시 그 친한 친구로 "모처럼 붙었으니까 일단 해봐".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도쿄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케야키자카46로 데뷔. 그저, 필사적이었다.


상경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어쨌든 레슨을 받는 매일매일. 댄스, 워킹, 모델, 노래, 연기... 요일마다 분야가 달라서 솔직히 이제 그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웃음). 지금이라면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아직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멤버끼리도 마음을 터놓지 못 하고 "이 애는 누굴까?"라는 상태. 새로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레귤러 방송 '케야키라고, 쓸 수 없어?'의 녹화가 시작되고 그라비아 잡지에 나오게 되면서 서서히 실감이 난다고 할까, "아이돌이란 게 이런 거구나"라고 조금씩 익숙해져갔고... 예를 들면 저녁인데도 "오하요고자이마스(아침 인사)"라고 인사하거나, 잡치 촬영 현장에는 많은 스태프 분들이 있고, 그 모든 분들이 저를 만들어 주시거나.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논노는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라고 감동도 했습니다.

멤버는 저를 포함해서 모두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에는 좀처럼 깊은 관계가 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레슨을 거듭하면서 점점 긴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2016년 여름에 멤버 전원이 출연했던 드라마 '토쿠야마 다이고로를 누가 죽였을까?'가 굉장히 컸달까. 아침부터 밤까지 다 같이 촬영했었기 때문에 휴식시간은 필연적으로 멤버끼리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아서 모두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던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드라마 방송부터 3개월 거슬러 오르면, 2016년 4월에는 케야키자카46의 데뷔 싱글 '사일런트 마조리티'가 발매. 초동 26만 2000장이라는 숫자는 오리콘 1위를 기록. 게다가 여성 아티스트 데뷔 싱글 초동 기록을 새로 쓴 케야키자카46은 더할 나위 없는 눈부신 스타트를 끊었다.


오리콘 1위라든지, 역대 1위, 물론 굉장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의 저희들은 무엇이 어떻게 대단한지를 몰라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친구나 주변 스태프 분들이 "좋은 곡이네"라고 말해주는 건 기뻤네요. 2016년은 그 뒤로도 2번째, 3번째 싱글을 발매하고 첫 원맨 라이브를 개최, 그리고 연말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 그 한창 때에 있던 저는, 그저 눈 앞에 있는 걸 필사적으로 해나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이 1년동안 인생의 모든 걸 경험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건 '홍백'에 대해선 극도의 긴장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나중에 방송을 다시 보고도 스테이지 위에 있는 건 내가 아닌 것 같고... 지금 그 때의 저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출연할 수 있으니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2016년 12월 31일의 저는 그렇게 말해도 절대 믿지 않을 것 같지만요(웃음).



모델 일이, 카메라에 대한 의식을 바꿔줬다


2017년의 와타나베 리사를 말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일 중 하나. 그건, 논노의 전속모델로 결정되어서, 케야키자카46에서 처음으로 패션지 전속모델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무소의 스태프 분으로부터 논노 모델 오디션을 받지 않겠냐고 들었을 때는 솔직히 "또 오디션을 보는 건가..."라고(웃음). 케야키자카46의 오디션에서 몇 번이나 저를 어필하지 않으면 안 됐던 괴로운 기억이 되살아나고 말았습니다. 논노의 오디션에서는 다른 응모자 분들이 논노 모델이 되고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마음가짐을 말하는 중에 저는 "논노 모델이 되면 케야키자카46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었네요. 지금 생각하면 논노를 발판으로...같은 실례인 발언이었다고 반성하고 있지만요(쓴웃음).

하지만 그 때는 "내가 논노 모델이 되는 게 케야키자카46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만 앞섰습니다. 그런 저를 논노 모델로 뽑아주신 편집부 분들에게는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해요. 합격했을 때는 계속 읽었던 잡지에 제가 나온다는 이상한 기분과 여러 옷이나 화장에 도전할 수 있다는 두근두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논노 모델이 되고 기뻤던 건 많지만, 그 중 하나가 전부터 동경했던 아라키 (유코) 씨와 1년 째에 같이 촬영했던 것! 게다가, 그 이후 촬영장이나 패션쇼에서 만나면 "릿짱"이라고 불러주시는 게 기뻤어요. 저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 아라키 씨와 고등학교 친구들 뿐이었습니다. 악수회에에 와주시는 여자 팬 분들이 많아진 것도, 정말 기뻤어요. "논노를 보고 좋아하게 돼서, 케야키자카46의 곡도 듣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오디션에서 말했던 게 조금은 실현되었구나, 싶었어요.



센터를 짊어질 수 없었던, 2017년. 이대로라면 "그룹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2017년 6월호부터 지면을 장식하게 되어서, 발군의 스타일과 쿨 뷰티 분위기로 바로 인기모델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모델 일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들 뿐이었다고.


어쨌든 포즈나 움직이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저 스스로도 "몇 번이나 똑같은 포즈를 하고 있구나"라고 낙담하면서도, 레퍼토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조금이라도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완성된 논노를 보고 다른 모델분은 저와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포즈를 하는지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다음 촬영에서 시험해봤어요. 그걸 반복해 가면서, 의외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범위보다 크게 움직이는 편이 좋구나, 라든지 카메라맨 분과 편집하는 분들이 "좋아"라고 말해준 동작은 나오는구나,라고 제 안에서 확인하거나.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점점 촬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델 일을 시작하고 제일 크게 변했다고 느끼는 건 카메라가 어렵다는 의식이 없어진 것. 원래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어렸을 때의 사진도 별로 남아있지 않아요. 케야키자카46도 그렇게 웃는 얼굴로 찍는 촬영이 많지 않은 그룹이어서,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 웃는 것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제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컸어요. 제가 웃는 얼굴을 보고 촬영 중에 텐션이 낮아지는 걸 피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 나오는 모니터를 보지 않았을 정도로(웃음).

하지만 2018년 정도부터는 의식을 바꿔서 다 찍고 난 뒤에 흘끗 한 번 보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의 각도나 방향에 따라 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쪽에서 찍힐 때가 많은지, 턱을 너무 드는 버릇... 막상 체크하게 되니 깨닫게 된 게 많았어요. 제 웃는 얼굴을 보고 위축되는 것도 없어졌고, 그 때의 표정을 받아들이고 다음 번에 살리게 된 것 같아요. 모델 일을 할 때, 웃는 얼굴은 옷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 지금의 목표는 아라키 씨 처럼 보시는 분이 밝고 힘이 날 수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사진은 정지화면이기 때문에 동영상에 비해 전해지는 정보량이 제한적이지만, 그만큼 포즈나 표정을 좀 더 연구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2019년 5월호에서는, 첫 단독 표지를 장식하게 된 것도 화제에.


패션지의 표지는 모델 일을 하는 이상, 누구나 한번은 동경하는 것. 2018년에도 한 번 니시노 나나세 씨와 투샷 표지를 했었는데, 그 때는 니시노 씨 덕분에 저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단독 표지의 꿈을 이뤘을 때는 전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었습니다. 표지 촬영은 다른 페이지 촬영을 하는 중간에 찍어서, 좋은 의미로 "표지!"라는 느낌이 없었어요. 의상이 평소 제가 입는 것 같은 파란 셔츠였기도 해서, 너무 긴장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센터 히라테의 부재를 지탱해준 친구의 존재


모델로서 순조롭게 활동하는 한편, 2017년에는 케야키자카46로서도 4th 싱글 '불협화음'을 릴리즈. 그 다음 날에는 데뷔 1주년을 기념한 라이브가 열리고, 여름의 야외 원맨 라이브 '케야키공화국2017'도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그 후 1st 앨범 '새하얀 것은 더럽히고 싶어져'의 전국 투어 중, 데뷔 때부터 센터를 맡아온 히라테 유리나의 컨디션 불량으로 인한 부재라는 긴급 사태가 발생한다.


리허설에서는 히라테가 히라테가 나오지 않는 경우를 대비해서 몇 명의 멤버가 대리로 센터에 설 준비를 했어요. 저도 한 곡을 담당하게 되어서 안무도 외웠는데, 막상 전체 리허설이 시작되서 서는 위치를 확인하니까 "나는 무리야"라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울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평소에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멤버인 후짱(사이토 후유카)도 울고, 이제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거기서 일단 스태프 분에게 히라테도 같이 멤버끼리만 대화하는 시간을 받았어요. 모두 여러가지를,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그 날은 결국 전원이 스테이지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공연은 역시 히라테의 컨디션도 돌아오지 못한 채로 계속되어서... 2017년은... 솔직히, 올해로 그룹이 끝나는 게 아닐까, 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전국 투어도 잘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보러 와 주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각 멤버가 많든 적든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낙담하고 있던" 시기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시기에도 제가 정신적으로 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향 친구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친구와 밥을 먹고, 실없는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케야키자카46이 아닌 저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서 파워를 충전하고 다시 케야키자카46을 위해 힘을 내고. 그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센터가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센터를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은 도망쳤던 센터와 마주한 뒤, 보였던 것


그리고, 2018년. 데뷔일인 4월 6일부터 3일 간, 케야키자카46의 '2nd YEAR ANNIVERSARY LIVE'를 개최. 거기서, 리사는 '피뢰침'과 '월요일 아침, 스커트를 잘렸다', 두 곡의 센터에 서게 되었다.


스태프 분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전년도 투어에서 할 수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해서 "이번엔 절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는 못 한다고 할 때가 아니야"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케야키자카46의 많은 곡들은 한 명의 주인공과 그를 지지해주는 사람이나 방관자들이라는 세계관. 그걸 더욱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퍼포먼스도 가사에 맞춰져 있어서, 충분히 곡의 세계관에 빠지고 정신적으로도 끌려가는 게 많습니다. 그만큼 들어주시는 분들에게 닿을 거라고 생각했고, 제가 그 주인공이 되기에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히라테의 과거 퍼포먼스는 전혀 보지 않고, 저 나름대로 노력하자고 생각하고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첫 센터. 그건, 그룹의 가운데에 서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해준 일이기도 했다.


그 경험은 저에게 정말 정말 컸어요. 느끼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센터라는 포지션은 주변에 그럴 생각이 없어도, 멋대로 멤버와의 거리를 느끼는 고독한 곳이었습니다. 데뷔하고 2년동안 그런 감정을 혼자서 끌어안고 싸워 온 히라테는... 대단해요.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을 깎아가면서까지 계속 서 주었구나, 라고. 실은 그 때, 히라테가 저희 집에 와서 둘이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히라테는 영화 촬영 중이어서 "촬영은 어때?"라고 물어보거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시시한 얘기를 하고 웃거나. 정말로 평범한,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지만 "계속 같이 활동했지만,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해에는, 연말 음악 방송에서 피로한 '안비바렌토'에서도 두 번째로 센터를 맡았다.


그 때는... 물론 긴장도 부담도 있었지만, 애니버서리 라이브에서 센터를 했던 만큼, 그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고 할 수 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른 프로그램도 포함해서 연말은 프론트 멤버 네 명이 센터를 돌아가면서 무대에 섰는데, 제가 아닌 멤버가 센터에 서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느낀 게 있었어요. 저, 그 때까지는 센터가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걸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역할은 절대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센터에 얹어주지 않으면 센터도 기분이 오르지 않는다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지지해주면서도 센터를 이끌어줘야 해요. 똑같은 "지지해준다"지만,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해야할까... 연말의 그 경험 속에서 저는 지금까지 센터를 지지해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룹 존속의 위기에, 센터라는 높은 벽. 괴로운 만큼 소중한 것을 깨닫고, 성장했다. 와타나베 리사는, 케야키자카46의 멤버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음... 뭐랄까, 뭐랄까요. 뭔가 "이걸 해 보고 싶다"는 게 구체적으로 보여지면, 일도 더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는 이걸 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자신이 있다면, 세계가 더욱 넓어지지 않을까요. 계속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걸 찾을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좀 더 제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싶어요.


'자신감을 갖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 그리고 그 말 자체로 이전보다 좀 더 자신감이 엿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고 있는 걸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케야키자카46 활동을 하면서 전하고 싶은 건 말하는 편이 좋다고 느끼는 기회가 늘었어요. 그걸 조금씩 실천하고 있는 게, 자신감이 생겼다고 생각해주시는 요인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발언이 새로운 일로 이어지는 것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더 발신해 나가고 싶어요. 이 사진집도 그런 계기의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와타나베 리사는, 역시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말 하나하나에서 강한 의지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래도 역시 이때다 싶을 때는 노력이나 고민을 그저 숨겨버리겠지. 부끄러움을 잘 타던 소녀의 "과묵"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인함과 부드러움과 각오의 상징이 되었다. "과묵"한 그녀는 지금, 부드럽게 날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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